『열반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임하실 때, 비탄과 괴로움에 빠진 대중들 앞에서 열반이 곧, 괴로움이 아닌 상락아정, 즉 항상하고 즐겁고 아我이고 깨끗한 것임을 연설하시니, 이는 중생의 고통과 슬픔을 희열과 희망으로 바꾸신 대반전의 장면을 연출하신 것입니다. 『열반경』은 대승불교 발전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상들을 담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열반의 상락아정常樂我淨, 부처님이 법신으로서 항상 우리 곁에 자리하신다는 법신상주法身常住, 모든 중생은 부처님의 성품을 내재하고 있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입니다. 이 세 가지 사상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상생의 종교, 나눔의 종교, 희망의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한 결정적인 부처님 말씀의 요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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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무참이 대승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은 열반경과의 인연에 의해서이다. 당시까지 그의 강설은 매우 정밀하고 논리적이어서 학문과 변론에 있어 능히 그를 상대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대승학자인 백두(白頭)선사를 만난 후 상황은 달라졌다. 담무참은 백두선사와 논쟁을 벌였으나, 100여 일이 지나도 끝을 보지 못하였다. 담무참이 아무리 정교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논리로 공격하여도, 백두선사에게서 허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담무참은 논쟁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무참은 선사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물었다.
“스님의 설법이 심오함을 보니 제가 감히 접하지 못한 경전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어떤 경전을 공부하신 것입니까?”
이에 백두선사는 나무껍질에 새긴 열반경을 보여줬다. 담무참이 그 내용을 살펴보니 그 뜻이 광대무변하여 자신이 공부한 소승경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에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틀 안에서 자만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크게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담무참은 대승에 전념하여, 나이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대소승의 경전 2백만 자를 암송하게 되었다. 담무참에게 있어 열반경은 그를 대승의 바다로 뛰어들게 한 계기일 뿐 아니라 대승의 사상을 가장 대표하는 경전이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토록 열반경을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역경사업에 있어서도 가장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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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무참이 역출한 대승경전 중에서 특히 열반경은 일승원교의 불신(佛身) 및 불성론(佛性論)을 통하여 대승의 근본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한 경전으로 이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대승경전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담무참은 열반경을 통하여 대승의 진리를 깨달았고 평생토록 열반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도 열반경을 구하다가 생사를 달리한 인물이다. 담무참이 왜 평생토록 열반경을 중요시 하였을까? 아마도 그는 열반경에서 다른 그 어떤 경전에서도 얻지 못할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열반경에서 얻은 무상(無上)의 진리가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은 오늘날 열반경을 공부하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하나의 화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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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비구들은 마땅히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하면,
1. 법에 의지해야 하고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의미에 의지해야 하고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지혜에 의지해야 하고 식별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4.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해야 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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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선남자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둡고 캄캄할 때 해와 달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리석은 범부들은 해와 달이 소멸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로 해와 달은 소멸하지 않은 것과 같다. 여래의 정법이 멸진할 때에 삼보가 나타나지 아니함도 역시 그러하여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니, 여래는 상주하여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니, 여래는 상주하여 뒤바뀌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삼보의 진실한 성품은 어떤 모든 때(垢)로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선남자야, 비유하면 연꽃이 햇볕에 비추이게 되면 피지 않는 것이 없듯이 모든 중생도 역시 그러하다. 대열반의 해를 보고 듣게 되면 마음을 일으키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빠짐없이 마음을 일으켜서 보리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대열반의 빛이 털구멍에 들어가면 반드시 미묘한 원인이 된다’고 설하는 것이다. 일천제는 비록 불성이 있더라도 무량한 죄업에 얽혀 있다. 그리하여 나오지 못하는 것이 마치 누에가 고치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리의 미묘한 원인을 일으키지 못하고 생사에 유전하면서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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