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사람들이 동성애라는 쉽지 않은 주제에 대한 지표를 얻고자 할 때 고려하는 네 가지 주요 원천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대부분 사람이 네 가지 원천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우리 각자는 이것보다 저것에 상대적으로 더 큰 무게를 둔다. 이 중요한 정보의 다양한 원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어떤 무게를 두는지를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각각의 원천에 어떠한 무게를 두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경험과 이성에 더 큰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들이 실제로 하는 것은 동성애자 정체성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이다.
반면에, 그들은 동성애자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한 그리스도인 성소수자들의 개인의 경험에는 그리 열려 있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특정 과학 자료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런 과학적 이해를 교회 내의 도덕적 논의에 적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논의에 대한 성경과 기독교 전통의 관련성을 낮출 수 있다고 믿는다.
그 후에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자신들이 변경한 믿음과 가치에 부합하도록 성경을 재해석하는 흥미로운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해가 가는 일이다. 당신과 가까운 누군가, 즉 당신이 알고 사랑하는 아들이나 딸이 이런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 때, 성경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이 힘겨울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문제로 씨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동성 관계를 맺는 동성애자로서 더 큰 행복감이나 만족감을 표현할지도 모른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과 교회 전통에 더 큰 무게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람직하다. 물론 모든 네 가지 권위의 원천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이 “으뜸”이며, 기독교 전통에도 상당한 무게를 둔다. 그들이 과학적 연구 결과에 관심을 둘수 있지만, 교회의 도덕 논쟁을 과학이 해결할 수 없음도 믿는다. 과학은 무엇이 발생하는가와 무엇을 측정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왜 이 행동이 아닌 저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는다. 즉 이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 의사결정에 대한 과학적 한계를 인지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성소수자들 이야기를 귀담아 듣으면서도, 동성애자 정체성을 형성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이런 개인의 경험의 측면을 가치 있게 여기지만, 동성애자이면서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반대하는 성 윤리의 변화를 추진하는 사람들로 바라보며 의구심을 품는다.
--- p.47~48
· 동성애적 끌림은 인간 유형에 대한 분류적 구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며, 이는 “본래 의도되지 않은 방식”의 다양한 인간 경험 중의 하나이다.
· 동성애적 끌림은 당신 경험의 일부일 수 있지만, 당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요소는 아니다.
· 당신은 동성에 대한 끌림의 경험을 동성애자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 반면에 당신은 생물학적 성, 사회적 성 정체성, 또한 그 외의 여러 가지를 포함한 경험의 측면을 중심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다.
·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됨의 가장 강력한 측면은 이들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이자 정의이다.
--- p.77
다른 사람들에게 동성애적 끌림의 경험을 말할 때는 기본적으로 동성애적 끌림, 동성애적 지향, 그리고 동성애자 정체성 사이의 3단계 구분법(제2장에서 논의했던)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때, 끌림의 설명적 측면에 더욱 집중하게 해 준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느끼거나 의문을 가진 청소년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주안점은, 청소년 자녀가 자신이 동성애적 끌림을 경험하고 있다. 어린 자녀나 청소년 자녀가 동성애자 정체성을 선언한다면?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모가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는 것을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놓여 있다. 부모에게 “저는 동성애자에요”라고 말하는 십 대와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부모에게, 이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한 단순한 설명이 아닌, 공표나 선언의 인상을 준다. 또한 많은 경우 이것이 실제로 공표나 선언일 수 있는 이유는, 십 대 자녀 혼자서, 혹은 또래와 이 문제에 대해 파악한 후, 나중에 그 결과(자신의 정체성)만을 부모와 공유하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흔히 십 대들은 특히 교회에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수 있으므로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씨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들은 사람들의 판단이나 실망섞인 표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사실을 부모나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다고 느낄 수 도 있다. 그러나 만약 십 대 자녀가 이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결론짓는다면, 수치심과 더 나아가 고립으로 인도하는 두려움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던 부모들에게는 상당히 극단적으로 다가오는 정체성선언으로 이어질 수 있다.
--- p.160~161
결론적으로, 나는 여러분들이 이 책으로부터 겸손과 관용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 겸손은 우리가 동성애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동성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많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기에, 그리고 어느 한 가지 요인이 성적 지향을 결정짓는 유일한 요인으로 보이지 않기에, 겸손은 부모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거나 “오직-주의”의 죄와 같은 단순화된 설명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막아 준다. 관용은 동성애적 끌림을 경험하는 우리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서 발견된다. 이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동료 신앙인들은 우리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사람들로 바라보아야 하며, 최소한 항상 관용의 마음으로 이끌어야 한다. 관용은 실제적인 성경적 소망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성적 지향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응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사람들과 분명히 소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 영적 성숙, 인격의 깊이가 그들이 경험는 성적 지향의 변화 정도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곧 그들이 누구인가의 핵심이며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인 정체성을 추구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미래의 한 부분,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의 한 부분을 맛보기 시작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맛을 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인들의 본질적인 지향이요 정체성이다.
--- p.32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