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혐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실천적 노력이 시작되었고, 바람직한 방향성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개신교회들은 대체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스스로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다. 사실 신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는 쉽지 않다. 신앙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미워해야 할 것은 미워하고 혐오해야 할 것은 혐오해야 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명료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혐오 행위에 참여하거나 맞서는 분명한 입장을 갖기가 쉽지 않다.
---「1장 “배제와 혐오의 동학”」중에서
윤리는 선과 악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윤리는 배제와 포용을 작동시키고 증오와 훈육, 용서와 재활을 가동한다. 그런데 윤리를 형성하는 공동체적 집단실천이 공동체의 전통과 내적 질서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그 덕목은 강력한 배제의 동학을 작동시킨다. 집단의 정체성 강화는 이질성과 차이의 배제를 동시에 작동시키므로, 공동체의 윤리는 폐쇄성이 아니라 개방성을 가져야만 순기능을 할 수 있다. 공동체를 강화하고 폐쇄적으로 작동시키려는 노력은 윤리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 증오와 혐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윤리를 추구하는 행태가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1장 “배제와 혐오의 동학”」중에서
한 종교의 교리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신의 전적인 은총만을 기대는 동등하게 한계적인 인간성을 강조한다면, 누구나 그 신 앞에 동등하게 평등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마땅하다. 실제로 이러한 자각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고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던 과거의 유럽과 아메리카대륙에서 노예 해방을 성취했다. 그런데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는 각각 20세기 독일에서 히틀러의 통치를 정당화시켜 주고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을 지지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민족이나 국가, 인종 등과 같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하나로 묶는 데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2장 “왜 기독교는 배제와 혐오의 대열에 서게 되었는가”」중에서
우리는 역사에서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기치 아래 이루어졌던 수많은 배제와 혐오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이미 알고 있다. 초대교회 시절 ‘다름’을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교회 분열, 중세 십자군 원정과 반유대주의의 탄생, 근대 견고한 국가 지배 체제 구축을 위해 이루어졌던 재세례파에 대한 탄압과 마녀사냥 등은 모두 역사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다.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고 도덕적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명목 아래 21세기 한국 교회에서 행하는 타자와 다름에 대한 불관용은 역사의 판례를 검토해 보면 그 답이 자명하다. 이제 멈추어 서야 할 때다.
---「2장 “왜 기독교는 배제와 혐오의 대열에 서게 되었는가”」중에서
시편은 확실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내려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토로한 말로 가득 차 있다. 현재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정치적으로 바로잡을 힘이 없는 약자가 하나님께 저주 기원을 토설함으로써 하나님의 임박한 개입을 강청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 권력 관계의 무자비한 비대칭성을 교정해 주시리라 희망하며 토설한 이스라엘의 저주 기원문은 이런 수사적 기능을 수행한다. 미래로 투사된 많은 말들이 하나님 백성의 희망적 상상(wishful thinking)과 기도로 표출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시가 형식을 띤 수사적 혐오 발언과 저주 기원문에서 기독교인의 바른 행동과 윤리를 형성하는 정경적 가르침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장 “성경에 포함된 혐오와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중에서
혐오는 이렇게 역겨움으로서의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고 또 증오라는 각도에서도 논할 수 있지만, 나는 이 글에서 역겨움과 증오를 따로 구별하지 않고 그저 ‘혐오’라는 하나의 용어에 통합시키고자 한다. 그렇다면 혐오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소수인 혹은 불이익 계층에 대해 경멸·적의·해악의 태도를 품고서 말·행동·상징물을 통해 그들의 안전·자유·생존 등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혐오 현상은 여러 방면에서 목격되는데, 대표적으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무슬림 혐오가 있다.
---「4장 “기독교 진리는 혐오를 함의하는가”」중에서
그런데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한국 교회가 추가로 고려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그와 같은 혐오 표현의 선봉에 한국 교회가 앞장서 있다는 사실이다. 최신 판본인 ‘무슬림에 대한 혐오 발언’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발언’을 종교 표현의 자유로 이해하고,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한 정당한 규제를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제약’으로 받아들여 신앙적 결기로 다시 혐오 발언을 하며 싸운 경우들이 있었다. 결국 혐오 표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교회의 문제이며, 한국 교회에 많은 책임이 걸쳐진 문제이기도 하다.
---「5장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혐오 표현의 정의, 해악, 대응”」중에서
따라서 혐오 표현의 문제를 인식하고 공감하려면, 일종의 ‘소수자 되기’가 필요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과 혐오 표현으로 인한 피해를 기억하고 다른 소수자 집단에게도 마찬가지의 해악이 가해질 수 있음을 공감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5장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혐오 표현의 정의, 해악, 대응”」중에서
혐오는 혐오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더욱이 혐오가 소수자나 약자를 향할 때 그 파괴력은 더욱 극대화된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소수자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그들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며 회개와 변화를 강요하는 것은 한 존재를 비하하고 부인하며 삶을 파괴하는 행위다. 강단에서 목회자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하거나 교회 공동체가 반동성애적으로 행동할 때, 이것은 단순히 말이나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헤어날 수 없는 수치와 자기혐오로 빠뜨리고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소리 없는, 존재 아닌 자들로 살아가거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와야 한다.
---「7장 “동성애, 혐오를 넘어 편에 서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