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범주는 넓다. 개인의 심리적 편안함에서 우주적 조화까지 이어질 뿐만 아니라, 특히 분단으로 인한 심각한 갈등을 넘어 통일과 그 이후 사회적 통합까지 이루어내야 하는 한반도의 경우 평화는 복잡하게 꼬인 정치 및 사회적 현실까지 반영해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면서 필연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한 문장으로 평화를 규정하라면,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라면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형성 및 전개되고 있는 폭력을 지속적으로 줄여 궁극적으로는 일체의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기여해야 할 책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평화의 신학』의 필자들은 글을 쓰며 그런 책무의 일부라도 감당할 수 있어서 기뻤다. 아울러 ‘신학으로서의 평화학’ 혹은 ‘평화학으로서의 신학’의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었다. ---「머리말」 중에서
‘평화’라는 단수형 이상은 자기 완결적이지 않다. 진행형이다. 상호 이해를 통한 갈등의 지양이고, 그를 통한 다양성의 조화이며, 너와 나 사이의 차이가 상생적 조화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평화에 한 이해와 인식, 실천 방법 등이 달라서 서로 부딪히더라도, 공감의 지점을 향해 다시 화하고 합의하고 수용해 나가야 할 도리밖에 없다. 때로는 ‘횃불’이 필요하더라도 가능한 ‘촛불’을 들고서 ‘덜’ 무력적으로 폭력을 비판하고 화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화는 때로 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지만, 한 가지 평화론 혹은 방법론만 고집하는 데서 오는 폭력을 예방하고 이상적 평화를 향한 공공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평화를 이루는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리라”(마 5:9)는 예수의 선언은 오늘날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평화 연구와 실천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는 신학 및 신학자의 사명과도 통한다. 이 글의 주제로 말하면, 그것이 감폭력적 평화구축의 근간인 것이다. --- 이찬수(서울학교 통일평화연구원)「감폭력(減暴力)의 정치와 평화의 신학」 중에서
예수가 사용했던 ‘평화’는 인사말로 우리 인사말의 ‘안녕하세요’ 쯤 될 것이다. 사실 인사말이란 그저 인사말에 머무르며 유대세계나 헬라세계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누군가 단어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다고 떠벌리면 떠벌릴수록 싱겁게 들릴 뿐이다. 요즘 들어 내로라하는 평화 분석가들이 많아져서 하는 말이다. 오늘날에 평화라 할 때는 항구적 전쟁중지 상태를 넘어 전쟁의 위협마저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의 평화를 뜻한다. 글자 그로 요원한 이야기인 게 인류 역사상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는가 싶어서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교회 역시 평화와 관련해 엉뚱한 야심을 품어왔다. 수도자들이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 평화를 찾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치적 평화와 종교적 평화가 바라보는 곳은 확실히 다르다. 예수가 알려준 평화는 ‘이정도면 되겠지!’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를 거부한다. 간단히 말해 하느님이 허락하기 전까지 진정한 평화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은 마치 두고두고 되씹어 마땅한 선불교의 화두(話頭)처럼 다가온다. --- 박태식 (성공회학교)「성서의 평화, 그런 평화는 없다」 중에서
‘우분투’는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나도 존재한다는 ‘상호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불이적 자성은 정신계뿐만 아니라 물질계 가운데 결국 숨을 쉬고 있는 생명계에 향하고 인간을 향한다. 결국 상호존재신론은 신관이라는 하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복잡 하고 구체적인 삶과 유리되지 않는 사사무애(事事無?)의 신관이다. 그런 점에서 “원한 평화, 신적 정의의 구현으로서의 평화도, 신학적 이론과는 달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여러 세력들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는 방식으로 현실화”되고 “아무리 하늘의 언어를 설명한다 해도 평화에 한 연구가 인간성을 담보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연구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상호존재신론은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를 극복하는 해독제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종교 간 평화를 지향하고 종교적 평화담론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김종만(배재학교)「개신교 배타주의와 종교적 평화담론」 중에서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을 통해 평화를 건설하는 것은 ‘정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사랑’의 열매에 이른다는 것이다. 사랑이 정의에 입각하여 완성되어질 때, 평화는 도래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래야 인권, 공동선과 같은 보편적 차원이 포괄되기 때문이다. 참된 사랑은 혼자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발전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고발하고, 제안하며, 문화적 사회적 계획에 투신하도록 이끌고, 또한 긍정적인 활동을 고무함으로써 선의의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의 평화는 이웃에 한 사랑에서 생겨나며,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이며 결실이기 때문이다. --- 김혜경(한국학중앙연구원)「가톨릭교회 평화의 이름」 중에서
결국 다문화교육을 위한 풍류도모델은 한국적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종교평화모델이자, 평화신학적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종교신학과 해방신학 그리고 예술신학의 종지를 묘합시킨 모델로써, 21세기 한국적 다문화주의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풍류도모델의 구체적인 전개를 위해서는 종교신학과 해방신학 그리고 예술신학을 포함한 풍류-평화신학적 논의와 더불어, ‘평화인문학’33의 차원에서 계속적인 탐구가 요망된다.
--- 손원영(서울기독학교)「한국적 다문화주의와 종교평화교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