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다음날부터 저만의 바쁜 일과가 시작되었습니다.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호텔 근처 툴리스 커피(TULLY’S COFFEE)에 노트북을 들고 가서 일을 했어요. 점심시간쯤 되면 양복 입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식사를 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바쁘게 키보드를 누르다가도, 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은 어디서 일할까? 직업은 뭘까’ 슬며시 상상을 해보기도 했죠. 이국의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는 맑고 커피는 맛있고. 망중한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 p.26
순간 아, 이게 사랑인가, 싶어서… 아시아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에서, 좋은 음식과 하이볼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다니. 마치 저를 위한 자리인 것만 같았죠. 앞뒤 가리지 않고 프리랜서로 자리 잡기 위해서 정말 독하게 노력했던 지난 3년간을 모두 보상받는 듯한, 정말 너무나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 p.29
스나베에서는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예쁜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뒤 제방 위를 산책했다. 그러다가 다리가 피곤하면 제방 위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여유를 즐겼다. 세차게 몰려왔다 빠져나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찌꺼기도 깨끗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또, 저녁에는 힐튼 리조트 앞의 계단식 둑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석양이 지는 바다를 감상하기도 했다. 만약 짧은 여행이었다면 나는 이런 여유를 알지 못한 채 나쁜 기억만 안고 돌아갔겠지. 순간 모 숙박업체의 광고문구가 떠올랐다. 이래서 여행은 살아봐야 하는 거라고 했구나. --- p.43
홈스테이는 호스트 가족이 그 나라의 다양한 인적,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공유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홀로 어려움 헤쳐나가기도 분명히 값진 경험이겠지만, 호스트와 함께하면 초반부터 그 나라를 보는 시각이 넓어지게 된다. 교수님 부부가 유명 관광지와 맛집에 나를 데리고 다녀 주셔서 좋은 경험을 했고, 일본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많이 알게 되었다 --- p.60
한여름 밤의 서늘한 공기가 옷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좋았다. 친구들이 사 온 불꽃놀이 세트로 우리만의 불꽃 축제를 시작했다. 튀어 오르는 불꽃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깔깔대고, 머리를 맞대고 스파클러 불꽃을 들고 있으니, 마치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많은 경험을 하고 가는구나. 항상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소소한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일본으로 향한다. 언젠가 일본에서 또 다른 한 달간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날이 올까? --- p.63
나는 일본어가, 유미는 한국어가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유미와는 마음이 잘 맞아서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한다는 자체가 매 순간 즐거움이었다.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를 유미와 함께 시청하며 재잘재잘 웃으며 떠들기도 하고, 서로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는 방송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도 했다. 해 뜰 때까지 이불 속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며, 친구의 생활 속에 나를 점차 녹여가고 있었다. --- p.82
일본에 가기 전에 가졌던 막연한 걱정은 첫날 마신 생맥주 덕에 싹 가셨다. 일본어 대신 내 손짓과 발짓이 통했을 때는 짜릿하기도 했고, 기다리던 도시락을 반액에 샀을 때는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계산서에는 어이가 없었고, 지진과 목욕탕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일본 속담처럼, 마지막에는 좋은 사람들만 만나 좋은 기억만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한 달이었다. --- p.107
디자인이란 직업 특성상 인터넷과 컴퓨터만 있으면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들이 있어서, 런던 회사에서 하던 일 몇 개를 그대로 가져와 이어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한국에서도 몇 건의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는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디지털 노마드인가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돈 벌면서 이 나라 저 나라 여행 다니면서 살 수 있다니 좋은 세상이야!’란 생각에 신이 났었다. --- p.112
돌이켜보면 만족스러운 7주였다. 도쿄에서 하고 싶었던 일도 다 했고, 가고 싶던 곳도 거의 다 다녀왔다. (장하다!) 물론 디즈니랜드도 다녀왔다!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하며, 여행자라는 기분도 느낄 수 있는, 묘하지만 매력적인 시간이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한 달 살기가 매우 큰 도전이 될 수 있고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회가 오면 우선 저지른 다음 고민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서 도쿄는 한 달 살기를 처음 시도하기에 괜찮은 도시다.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고 가까우며, 다양한 분야의 마니아들이 많다. 찾고자 마음먹으면 없
는 게 없는 곳이다. 적당히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이방인의 기분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에게 도쿄 한 달 살기를 추천하고 싶다. --- p.121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고 낯가림도 심한 내가 외국에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래도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일본어를 쓰면서 생활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일본어 표준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하는 능력도 갖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건축을 전공하고 있어서 일본의 건축물, 특히 주택을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 p.125
그녀에게 하루하루 자극받으며 지내던 나는 일본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길을 조금 돌아오기는 했지만,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일본어 번역가가 되었다. 그전에는 꿈이 없었지만 몇 년 사이에 꿈이 생기고, 동경했던 사람을 좇아 꿈을 이뤄낸 셈이다. 내가 만약 그때 일본 셰어하우스에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건축가의 길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아직도 내 꿈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 p.135
혼자 자전거를 타고 처음 가는 동네를 돌아다니고, 잠시 멈춰 서서 일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들여다보고, 낯선 가게가 단골 가게로 변해가는 동안, 저는 새로운 문화와 마주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서툴기에 긴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짧은 유학 생활을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고, 자전거 구매는 그 시작이 되어주었습니다. --- p.147
한 달은 여행으로는 길게 느껴지지만 살아본다는 의미에서는 짧다. 적지 않은 돈을 사용하게 될 것이며,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아까운 시간이 되기도, 새로운 출발을 위한 특별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막연하게 대학원을 일본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있던 나에게, 일본에서 한 달 살기는 일본 대학원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p.160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비슷한 마음이겠지만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현지인처럼 말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사전으로만 알고 있던 단어를 현지인처럼 써보는 건 왠지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어학원에서 배웠던 일본어보다 일본인 친구들과 나누며 배웠던 일본어가 더 기억에 남는다. 일본 생활을 결심할 때 현지인과 가깝게 지내고 싶었던 처음의 각오를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 p.170
일본 생활이 내 이력서에 큰 영향을 준 것도 아니고, 인생을 바꿀 엄청난 기회를 만난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여행지가 아닌 일상 속 여유로운 일본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여유로움 속에서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가고 싶었던 여행지에서 살아보는 것, 배우고 싶은 언어를 배워보는 것,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이 어느 순간 일상처럼 익숙해지는 어떤 순간들,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
--- p.173
특히 일하는 중에 먹는 ‘마카나이’(賄い, 직원 식사)가 정말 맛있어서 일할 맛이 났다. 나중에는 주방장님과도 친해져서 나에게 한국 김치 요리법을 물어보시기도 했다. 엄마에게 요리법을 얻어 주방장님께 알려드렸더니 정말 고마워하셨다. 가게와 집은 자전거로 왕복 1시간 거리였지만 그때는 힘든지도 모르고 청춘을 만끽하는 기분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난다. 힘든 노동도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아름답게 빛났던 시간이었다. --- p.181
방안 가득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저절로 일어나는 아침, 조금 더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며 오늘도 여유를 부려본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으며 커피 한잔을 하고, 오늘은 뭘 해 볼까, 어디를 갈까 계획을 세우고 길을 나선다. 따사로운 오후 햇볕이 좋아서 무작정 발걸음 닿는 대로 걷는다. 배가 고프면 보이는 곳에 들어가 간단하게 요기도 한다. 그게 스위츠이든 고베규든 편의점 오니기리든 뭐든 다 좋다. --- p.195
교토는 한국인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고, 나도 단기 어학연수로 여행한다는 기분으로 교토를 방문했을 때는 많은 유적지와 신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최고의 한 달을 보냈었다. 그래서 교환 학생 제도를 통한 교토 단기 유학을 결심했지만, 교토는 관광의 도시이지 외국인이 1년
미만의 짧은 시간 동안 거주하기에는 굉장히 불친절한 동네였다. 어쩌면 내가 운이 나빴을지도 모르고, 소극적인 성격이 유학과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 p.241
이만큼 돈과 시간을 써서 일본에서 한 달을 살아보다니, 회사에 다니면서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최고의 사치였습니다.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 p.249
숨은 맛집을 찾아 즐긴 한 끼의 식사,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가을 단풍의 아름다운 풍경, 투박한 간사이 사투리를 쓰지만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단정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녹아든 오사카는 소심한 저에게 따뜻함과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 p.254
사실 일본에 가기 전, 나약한 자신과 점점 들어가는 나이(?)탓을 하며 한 달 살기 도전이 쉽지는 않을 거라며 지레 겁먹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 살기에 성공하면서 ‘하고 싶은 일은 도전하면 된다. 늦지 않았다’라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한 달 살기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오사카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사카는 지친 심신을 치유하고 만족감을 채워줄 멋진 도시입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p.259
도쿄나 오사카의 화려함만 보다가 와카야마에 가면 ‘일본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와카야마 교외에 있는 집 이 층 다다미방에서 생활하며 거실에 놓인 이케바나(일본식 꽃꽂이)를 매일 보고, 홈스테이 가족의 안내로 가정에서 약식 다도 체험을 하며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소도시에서의 슬로우 라이프를 꿈꾼다면 와카야마가 제격이다. --- p.266
와카야마에서의 한 달은 여행자와 생활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여유로 가득 찬 호사스러운 여행이자 일상이었다. --- p.273
단순한 성격이라 다행일까? 도쿄 도착 3일 만에 금방 일본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아직이지만…). 가장 좋은 점은 집을 나서는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여행길이 된다는 것이다. 핸드폰으로 ‘도쿄 여행 코스’를 검색하고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아무 때나 여행 갈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 p.280
현지에서는 맛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행객은 전혀 안 보였다. 일본어로 가득한 가게에서 호젓하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밤늦게까지 가게에 있었지만 일본에서 돌아갈 집이 있으니 걱정 없었다. 여행으로 왔다면 느끼지 못할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이런 순간, 내가 정말 일본에 있음을 느낀다. 이 멋진 가게를 더 잊을 수 없는 이유다. --- p.285
제주도의 어느 숲길에서, 강원도의 깊은 산속에서 느낀 자연의 맛과는 다른 매력이 훌쩍 달려드니 피할 길이 없다. 숲으로 난 길을 차창 밖으로 보기만 해도 그 마력에 빠져든다. 그것은 너무도 강력하여 벗어날 방법이 없는 블랙홀과 같은 느낌으로 나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산하와 대마도의 자연 중 어느 것이 더 좋으냐고 물어보는데 질문이 잘 못 되었다. 각기 지닌 매력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