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라는 글에서, '위대함'은 개인의 능력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체제에 어느 정도 부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남성이 보편인 사회 체제 안에서는 위대함의 기준 역시 그에 부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그동안 위대한 여성 예술가, 디자이너 혹은 공예가가 없던 것은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줄 체제가 없던 것에 다름 아니다. --- p.7
바우하우스 학생의 3분의 1 이상이 여성이었고 여성 교사와 기술 마이스터들도 있었지만 그들에 관한 기록은 일천하다. 공예가, 디자이너 또는 미술가로 활동했던 바우하우스의 여성들이 이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까닭은 ‘남성과 여성’ ‘미술가와 공예가’ ‘건설자와 장식가’라는 이원론적 서사와 관련되어 있다. --- p.23
하지만 미술가를 고양된 공예가로 보는 시선에는 일정 부분 차별화된 무의식이 자리한다. 그림을 그리든 공예를 하든 미술가의 지위는 항상 고양되어 있는 것인가? 실제로 바우하우스의 교육 체제 안에서 조형 마이스터와 기술 마이스터의 영향력은 차이가 있었다. 학교의 의사결정 기구인 마이스터 평의회는 조형 마이스터와 학생 대표만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술 마이스터와의 협의 과정 없이도 학교의 주요 사안을 결정할 수 있었다. --- p.38
프리들랜더는 “폰드 팜은 학교가 아니다.…… 삶의 한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기술적 지식과 정신적 내용 사이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출세 지향적인 미국인의 삶이 아닌 다른 가치의 삶, 다시 말해 진정성, 몰입과 집중, 타인에 대한 존중, 자연과의 조화 같은 보다 철학적인 대안들을 중시했던 것이다. --- p.50
테레진에서 디커의 삶은 오로지 어린이들을 위해 미술을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교육을 금지한 나치의 눈을 피해 그녀는 종이와 미술용품 등을 밀반입했으며, 테레진 아이들이 두려움이나 저항감, 생존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던 소포를 이용해 교육에 필요한 미술 서적과 옛 대가들의 복제품을 지인들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조토(Giotto di Bondone), 크라나흐(Lucas Cranach),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반 고흐(Vincent van Gogh) 등의 작품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재해석하게 했는데, 혹여라도 아이들이 동일하게 복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몇 분 동안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 p.62
하지만 문제는 바우하우스의 조형 마이스터들이 만들어내고자 했던 ‘새로운 인간’이 남성적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바우하우스의 예술 이론은 재능이나 개성, 자연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이원론적 프레임에 근거하고 있었던 까닭에 부지불식간에 종래의 젠더 관념을 재생산하는 장치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들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예술, 삶, 인간에 대한 이원론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원론적 개념은 대부분의 바우하우스 마이스터들이 공유한 사고이기도 했다. --- p.76
하지만 목공방을 ‘덤’으로 사용했던 부셔가 남성들이 다루던 품목을 침범하거나 개발했다면 과연 그들은 부셔와 그녀의 작업을 용인했을까? 아이들과 관련된 영역은 남성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이기에 제품이 상용화되기까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든 여러 가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p.97
물론 그녀의 성공이 재능을 기반으로 한 것은 분명하나 재능 유무가 다른 여성들의 실패를 반증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도 알다시피 어떤 조직에서의 성공은 재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체제가 존속 가능하기 위한 규준에 부합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p.109
앞 장에서도 설명했지만 바우하우스의 교육 정책은 대다수의 여학생들을 직조 분야로 이끌었다. 그로피우스는 여성들에게 직조와 같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공예”를 선택할 것을 권고했다. 사실 직조가 쉽고 간단한 공예라는 평판은 제품이나 재료, 기술 등이 대부분 여성들과 관련된 가사용품이라는 데서 비롯된 부당한 편견이라 할 수 있다. --- p.135
입학 당시 다른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그랬듯 슈퇼츨 역시 바우하우스의 선언문에 표명된 새로운 이상에 매료되었고 새로운 출발을 기대했다. “나의 대외적인 삶에서 제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조직할 수 있다. 오, 나는 이것을 얼마나 자주 꿈꾸었던가. 이제 정말로 실현되었다. 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의 전공 분야 하나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슈퇼츨은 곧 성적(性的) 불평등을 인식하고 좌절했다. 그녀는 재빨리 여성들을 위해 분리된 공간을 주창했고, 그 이듬해 여성부(Women’s Department)를 제안하고 공동 설립한다. --- p.148
1929년 그녀는 마침내 소리와 반사광을 동시에 흡수하는 직물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빛 반사를 강화하기 위해 전면에는 셀로판을 사용하고 후면에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방음재를 사용한 직물이었다.6 이 작품은 아니의 졸업 시험 작품이자 독일 베르나우(Bernau)에 있는 연방학교(Bundesschule)에 설치될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연방학교는 당시 바우하우스 교장이던 한네스 마이어가 디자인한 건물로, 그는 이 직물을 학교 강당에 설치해 빛과 소음을 차단하는 장치로 사용하고자 했다. 면과 셔닐(Chenille), 셀로판을 재료로 사용한 이 직물은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미국의 건축가 필립 존슨(Philip Johnson)은 이 직물의 방음과 빛 반사 기능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이것이 그녀의 “미국행 여권”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 p.166
그렇다면 여성들이 유독 사진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여성이 테크놀로지나 기계에 익숙하지 않다는 관념이 지배적임을 생각하면 이는 다소 의외적이다. 하지만 당시 카메라는 새로운 매체였기에 회화를 비롯해 전통적인 예술 분야와 같이 여성의 진입장벽이 높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전통적인 매체가 생산해내는 여성의 이미지와 달리 새로운 이미지를 비교적 손쉽게 제작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이야말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슬로건에 매우 이상적으로 들어맞는 매체였다.
--- p.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