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 가족이 이집트에 거주한 기간은 그들로 그곳에 내려가게 했던 기근보다 수백 년은 더 지속되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두 가지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했다. 야곱(즉, 이스라엘) 가족이 이집트에서 크게 증가하는 것(창 46:3-4)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창 15:13)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다. 이들 사건이 이집트에서 일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야곱이 (기근의 압박에도)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가야 할지를 놓고 심히 고민하며 약속의 땅의 국경인 브엘세바에서 조상의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이집트로 가는 것이 더 큰 계획의 일부라고 확신시켜주셨다(창 46:2-4). 야곱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큰 민족으로 번성한 후에야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집트는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였다. 가나안과는 반대로, 이집트는 나일 강의 예측 가능한 물 공급과 더욱 온화한 기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있는 다른 나라에 비해 침략이 용이하지 않은 조건을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의 자연 환경 덕분에 이스라엘의 인구는 전능하신 하나님 손길 아래에서 괄목한 만한 속도로 증가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정치적인 상황 또한 이러한 증가에 유리하였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공직에 있으면서 이집트에 믿을 수 없는 삶을 가져다주었다. 기근이 왔을 때 이집트를 구해내고 번영을 가져온 공헌으로 그의 가족은 수십 년 동안 이집트의 정치적 호의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때는 지나가고 히브리 민족은 압제와 노역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야곱과 아들들을 포함한 가족이 처음 이집트로 떠날 당시에는 모두 합쳐서 겨우 70명에 지나지 않았다(출 1:5).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와 재산이 크게 늘어 이집트의 새로운 왕이 두려워할 정도가 되었다. 이 새로운 바로는 요셉과 그 친척에 대해서도, 또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 사회에 끼친 공헌을 알지 못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인구는 이집트 관원들에게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히브리 남아는 출생과 동시에 죽이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증가와 고통” 中에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종말은 멀지 않았다. 이스라엘 북쪽 지파들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로 돌아서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초대 왕으로 삼았다. 만약 여로보암이 오직 하나님께만 신실하게 남아 있었더라면,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대로 하나님은 여로보암에게 영원한 왕국을 제공하셨을 것이다(왕상 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원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성전은 다윗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그런 정책이 재통합의 가능성을 보여 줄 것이고, 자신이 북왕국을 취하였던 것만큼이나 재빠르게 그에게서 왕국을 빼앗아 갈 것을 두려워하였다(왕상 12:26-27). 그래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대신에 왕 중의 왕께 질투 어린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우고, 창조주 하나님과 직접적인 적대 관계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업의 첫 순서는 여로보암의 새로운 국가 종교를 위한 구심점으로 우상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의 왕국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혼합되어 있었다.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 사람과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였던 이스라엘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그의 신생 정부를 위한 잡종 국교를 만들었다. 그는 바알을 닮은 송아지를 만들어서 벧엘과 단에 두고(왕상 12:28?33), 장막절에 관한 모조품 신앙을 가르치며, 그가 만든 이 금송아지가 이집트에서 야곱 자손을 인도해 낸 신이라고 백성에게 거짓을 말하였다.
최북단의 예배 중심지는 주요 도로의 길목인 단에 자리하였다. 북왕국에서 여로보암의 남쪽 예배 처소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산지 길의 벧엘에 세워졌다. 이 장소들 각각에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사기는 단 자손이 라이스(훗날 단으로 알려진)로 가서 자신들을 위한 신상을 세우고 그들의 우상 숭배를 집행할 타락한 성직자를 지명하였다고 자세히 밝힌다(삿 18:29.31). 따라서 여로보암이 단에서 송아지 숭배를 결정하고 타락한 성직자를 지명하였을 때, 타락한 곳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전에 예배 처소로 사용되었던 장소에서 그렇게 하였다. 벧엘은 또한 아브라함과 야곱의 시대(창 12:8; 28:16. 19; 35:1)로부터 사무엘의 시대(삼상 7:16)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기억할 장소였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벧엘에 대한 이 역사적인 연관성을 떠올려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남쪽으로 수 킬로미터를 더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결국 단과 벧엘을 선택함으로 여로보암 왕국의 북쪽과 남쪽 경계가 확정되었다. 이 두 행정 중심지에 성소를 둠으로써, 여로보암은 그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연합 지파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의 왕국으로 알려졌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17:11; 24:2, 15; 왕상 4:25). 이렇게 여로보암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을 “단에서 벧엘까지”로 교체함으로 자신의 것을 주장하였다.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우는 여로보암” 中에서
왜 천사들은 새 왕의 탄생을 목자들에게 전했던 것일까? 왜 하필 베들레헴 들판에 있던 목자들이었을까? 이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목자들이야말로 메시아가 절실히 필요하였던 사람들의 대표 격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세기 유대의 사회 계급을 감안하면, 목자들은 사회의 최하층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은 아이들이 목자가 되는 것에 부정적으로 가르쳤다. 왜냐하면 “목자들과의 거래는 도둑과의 거래와 같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목자에게서 직접 구입한 양털이나 우유, 어린 염소는 훔쳐온 것일 가능성이 크기에 유대인은 목자에게서 직접 사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다. 1세기 관점에서 본다면 목자들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용서와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용서와 이해를 위한 메시아의 탄생 소식이 그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과 같은 성경의 다른 목자들과 연결이 될 수 있다(창 13:7; 46:32; 출 3:1; 삼상 16:11). 이들은 각각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예수님이 탄생할 날을 기다렸다. 물론 이들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에게 하신 이 약속이 모두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
사실, 천사들은 약속의 땅 다른 곳에 살던 아무 목자에게 라도 나타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셨을까? 이것은 베들레헴 동편의 들판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베들레헴 들 판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목자들이 성전 제사에 쓸 동물들을 보살펴 왔다. 이런 의미를 감안할 때, 천사들의 메시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즉, 성전에서 희생 제사로 드려질 운명을 가진 양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천사들의 메시지가 선포된 곳에 있었고, 이 양들은 죽음으로서 세상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를 상징한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목자들은 구유에 놓인 예수님을 만나고 돌아가며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올렸을 것이 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베들레헴 들판에 있는 그들에게 찾아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들판의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 中에서
베드로가 성전 지도자들의 비합법적 권위에 도전하고(행 4:19-20), 스데반이 이와 동일한 주제로 성전에 대해 합법적 권위를 가지신 분, 곧 하나님의 메시아를 공회(산헤드린)가 거부한 것을 지적하자(행 7:1-53)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행 8:1). 나사렛 사람들(the Nazarenes,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들, 행 24:5를 보라)은 사울 앞에서 흩어졌다. 사울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잡아넣고 있었다(행 8:1-3).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이 새로운 박해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속히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퍼졌다.
어째서 일부 유대 신자가 사마리아에 갔으며, 또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가 그곳에서 수용될 수 있었는가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눅 9:52-53). 그래서 빌립같이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은 사마리아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한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멸시하는 만큼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하였기 때문이었다(요 4:9).
둘째, 사마리아로 내려간 빌립과 다른 사람들은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예루살렘 박해를 피할 피난처를 발견하였다. 예수님이 수가를 방문하셨을 때, 거기서 말씀을 환영하는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야곱의 우물가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에 온전히 사로잡혀,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어찌된 일인지 만난 적도 없으면서 자기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계시 는 분을 만나게 하였고,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녀의 인 도로 메시아를 믿었다(요 4:39-41).
셋째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신자들이 사마리아에서 더 환영을 받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공동체였기 때문이었다. 한때 이 지역은 우상 숭배에 빠진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부였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앗수르가 북왕국을 정복하고 그 지도자들을 사로잡아 가게 하셨다. 사마리아는 앗수르가 이주시킨 사람들과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혼합되고 말았다(왕하 17장). 이런 역사와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메시아가 그의 모든 질문에 답해 주실 때를 기다렸다(요 4:25).“
---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빌립”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