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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신포도

늑대와 신포도

정경윤 | 동아 | 2012년 08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6.0 리뷰 1건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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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8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128*188*30mm
ISBN13 9788997830343
ISBN10 899783034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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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못 알아듣겠어. 지리멸렬한 소리는 그만두고 5W1H에 입각해 간결하게 설명해봐.”

권수빈의 싸늘한 명령에 남자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이것 보라고. 난 수빈 씨의 이런 점이 싫은 거야.”

“이런 점이라니?”

“되묻는 말조차도 숫제 상사의 명령조잖아. 당신 만날 때마다 난 늘 머리가 아팠어. 이건 도대체 연애를 하는 건지 거래처 사장을 접대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나는 말이지, 당신 회사 자동차 부품 공장 돌아가는 이야기나 품질 개선 방법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아. 복잡한 것은 질색이니 나도 애인을 만나면 좀 쉴 수 있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고 싶단 말이야. 알아듣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네. 국제 타이어, 당신네 회사잖아. 당신네가 생산한 타이어가 우리 센텀모터스 대부분의 차종에 장착되어 출고되는데, 장차 국제 타이어의 오너가 될 사람에게 일 얘기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수빈이 날카로운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주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마침내 우거지상이 되었다.

“이것 봐. 여자라면 최신가요나 드라마 이야기라든지, 아니면 쇼핑한 이야기라든지, 여름휴가엔 어딜 갈까, 맛있는 식당을 찾았다든가, 그런 말랑말랑한 거 많…….”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수빈의 얼굴에는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한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입안으로 흘려 넣은 후 비장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수빈 씨. 나…… 실은 다른 여자 있어. 발랄하고 귀여운 여자야. 만나면 가슴 떨리고, 내 마음도 잘 이해해줘서 아주 편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서 산뜻하게 대꾸했다.

“젖비린내 풀풀 나는 그 스물세 살 여대생 말이야? 장난 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헉!”

“그래. 나랑 띠동갑이니 뭐, 싱싱하고 좋겠지. 그런데 그렇게 평범한 집안 여자를 당신네 깐깐한 집안에서 받아주려 할까? 엔조이라면 모를까, 결혼까진 절대 무리일 걸?”

수빈이 맛없는 음식을 씹다 뱉어내듯 던진 말에 남자는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우와, 독하다, 진짜!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쳇. 차라리 잘 됐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으면, 서로 좋았던 추억만 가지고 여기서 끝내자.”

“좋았던 추억? 좋긴 뭐가 좋았다는 거야? 그리고 당신이 그 애송이 계집애 만나기 위해서 나랑 헤어지겠다는 건 말이 안 돼. 내가 울산 공장에 내려가 있는 사이에 몰래 양다리 걸치고 다닌 지 벌써 1년도 넘었잖아. 둘이서 나 몰래 브라질로 여름휴가까지 다녀왔다며.”

“뜨헉……!”

“사람 물로 보니? 아무튼, 지난 일은 됐고, 자, 이제 최선을 다해 나를 이해시켜 봐.”

“무슨……?”

“우리가 지금 헤어져야 하는 당위성 말이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해 보라니까.”

수빈의 싸늘한 어조와 날카로운 눈에서 흘러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기에 잔뜩 눌린 남자는 한참이나 그녀를 쳐다보다 이를 악물고서 물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말로 하지, 그럼 보고서로 받으리?”

수빈이 사납게 노려보며 빈정거리자 남자는 마침내 질렸다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서 목청껏 소리쳤다.

“좋아! 그렇게 듣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주지! 내가 당신을 못 견디겠다! 당신 같은 여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는 단언컨대 이 세상엔 절대! 아마 절대로 없을 거다! 야! 권수빈, 너, 제발, 제발 부탁이니 여러 남자 괴롭히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혼자 살아라! 아앙?”

분을 못 이겼던지 남자는 끔찍한 저주를 퍼부은 것도 모자라 주먹까지 흔들어 보이며 뒤돌아서 바를 나가 버렸다. 바 안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홀로 남겨진 그녀는 시선들을 전혀 아랑곳 않은 채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아아, 젠장. 또 차였잖아.”

잔에 남은 술을 쭉 마셔 버리고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바텐더가 다가와 빈 잔을 치워주고 그녀의 앞에다 뭔가를 쑥 내밀었다. 선명한 분홍색 칵테일이 담겨진 작은 잔이었다.

“핑크레이디입니다. 저쪽 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텐더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씹다 버린 멍게 꼭지 같은 전 애인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훤칠하고 섹시한 외모의 한 남자가 맥주를 마시며 목례를 해왔다.

살 떨릴 정도로 유치한 이름의 칵테일과 남자의 말쑥한 얼굴을 차가운 눈으로 번갈아 본 수빈은 속이 뒤틀린 나머지, ‘지금 장난 하자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잔을 들어 단숨에 완샷 해버렸다. 이쪽을 보고 있던 그 남자와 곁에 서있던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백에서 지갑을 꺼내들고서 호기롭게 소리쳤다.

“계산이요!”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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