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제2언어 습득론이란?
제2언어 습득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제2언어가 어떻게 습득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정의는 사실 굉장히 복잡한 의미와 학문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모국어 혹은 제2언어로 습득하는 ‘언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제2언어 습득은 모국어라는 하나의 언어 체계를 이미 머릿속에 갖고 있는 언어 사용자가 모국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어 체계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습득의 과정 및 최종 결과 역시 모국어 습득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제2언어 습득은 모국어 습득과 달리 사람마다 습득의 결과 혹은 수준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제2언어 습득이 언어적인 측면 이외에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가지 변인이 개입하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제2언어 습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 자체에 대한 연구 분야인 언어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뇌신경학 등 연관 학문 분야의 폭 넓은 지식이 필요하고, 이것이 바로 제2언어 습득에 대한 연구와 완전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본 장에서는 제2언어 습득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을 몇 가지 살펴보고 제2언어 습득이 모국어 습득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몇 가지 문헌의 주장들을 참고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제2언어 습득의 과정을 이해하고 제2언어 습득론의 연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용어들을 관련 개념들과 대조해가면서 제시하도록 하겠다.
1.1. 제휴 학문으로서의 제2언어 습득론
많은 이들이 제2언어 습득론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라기보다는 외국어교육의 일부로 간주하여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외국어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보충해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과 원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제2언어의 습득 과정과 원리를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일견 타당한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제2언어 습득론은 1960년대 이후 외국어교육은 물론 모국어 습득 이론, 언어학, 심리학 등의 많은 학문 분야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발달해 왔고, 1990년대 이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이론이 확립된 이후에도 이러한 제휴 학문(interdisciplinary 또는 multidisciplinary discipline)으로서의 특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2언어 습득론은 독립된 학문 영역으로서의 특성과 함께 다른 학문 영역에 대한 이해 없이는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제휴 학문으로서의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2언어 습득론과 관계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는 제2언어 습득의 과정을 각각의 학문적 특성에 맞추어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언어학적 접근에서는 학습자들이 습득하려고 하는 제2언어의 언어학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심리학적 접근에서는 학습자들의 인지구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인지 현상에, 사회학적 접근에서는 언어의 사회학적 측면, 다시 말해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초점을 두고 언어 습득을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제2언어 습득론과 관련이 있는 각 학문 분야별로 제2언어 습득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간단히 요약하도록 하겠다.
(1) 언어학적 접근
사실 언어학만큼 제2언어 습득론과 밀접하게 관련된 분야는 없을 것이다. 제2언어 습득의 이론과 원리들이 설명하려고 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습득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학습자언어와 습득의 결과물인 제2언어가 보여주는 언어적 특성들이고, 이러한 특성들은 시대별 언어학의 흐름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고 설명되어왔다. 20세기 초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부터 Chomsky의 언어학, 그리고 기능주의 언어학까지 모든 언어학 이론들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성을 파악하고 기술하려는 노력을 해왔으며, 동시에 모국어 습득은 물론이고 제2언어 습득의 과정까지 다양한 원리로 설명해왔다. 20세기 초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대조분석 가설이나 Chomsky 언어학의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이론, 그리고 최근 기능주의 언어학에서 제시했던 유형학적(typological) 접근이나 언어보편성(language universals)과 관련한 이론들이 모두 모국어 습득을 넘어 제2언어 습득의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다양한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심리언어학적 접근
모국어 습득, 혹은 제2언어 습득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만큼 인간의 심리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의 이론과 원리는 제2언어 습득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발달하기 시작한 인지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언어 습득을 정보의 습득과 저장 및 인출로 설명하는 정보 처리 이론(information processing theory)을 제시하였으나 그 설명이 추상적인 개념 수준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인지심리학은 컴퓨터의 발달, 새로운 인지실험 기제의 개발, 그리고 뇌신경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언어 습득 및 처리의 과정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 위주의 접근에 그치지 않고 언어 사용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행동에 대한 뇌의 작용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제2언어 습득 분야에서의 심리학적 접근은 향후 획기적인 발달과 변화가 기대된다고 하겠다.
(3) 사회언어학적 접근
Chomsky는 언어의 연구는 인간의 언어학적 능력(linguistic competence)을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Vygotsky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은 인간의 언어 습득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Krashen의 감시자모형(Monitor Model)에서는 입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Michael Long 등의 학자들에 의해 상호작용 가설(interaction hypothesis)이 제기되었고, 제2언어 습득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입력의 제공보다는 자연스러운 언어 습득 환경은 물론 교실과 같은 교수?학습 위주의 환경에서도 비원어민 학습자들끼리, 그리고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흐름은 2000년대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지 않는 한 제2언어 습득에 있어서 사회언어학적 접근은 제2언어 습득론의 중요한 축을 이루게 될 것이다.
(4) 교육학적 접근
일반적으로 언어 습득은 교실에서의 교수?학습에 의한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언어 사용 환경에서 입력과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1970년대 이전의 문법-번역식 교수법이나 청화식 교수법이 주로 사용되던 시기에 교실에서의 외국어교육은 습득이라기보다는 규칙의 암기나 반복 연습 위주로 학습을 강조했고 그러한 경향은 습득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의사소통능력이 강조되고 교실에서의 외국어교육에서도 의미의 협상이나 상호작용을 통한 의사소통능력의 습득이 중요해짐에 따라 교실과 같은 인위적인 환경에서의 교수?학습에 의한 제2언어 습득의 이론과 원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980년대 말 이후 새롭게 등장한 교수?학습의 원리인 형태 초점 접근법은 기존의 의미 위주의 의사소통을 강조하던 의미 위주 접근법과 달리 교실에서도 교사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외국어교육을 강조하고, 그에 따라 형태 초점 접근법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교수?학습 방법론들이 주목을 받게 된다. 문법 교육에 대한 시각이 새롭게 달라지고, 기존의 교수?학습 방법에 학습자의 주의력을 목표 문법 구조에 이끄는 다양한 방법론의 출현으로 제2언어 습득론은 교육학의 이론이나 실제 교수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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