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대신해서 철도운영기관에서 사용해온 정식 명칭은 ‘열차(列車)’이다. 철도에서 사용하는 열차의 사전적 의미는 ‘정거장 외 본선을 운행할 목적으로 조성한 차량’을 뜻한다. 철도 관계자들은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집착한 까닭에 ‘기차’라는 말 대신 ‘열차’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를 원했지만, 정작 일반국민들의 뜻은 달랐다. 기차라는 단어가 갖는 정겨움, 정든 시골길을 칙칙폭폭 달리던 기차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철도 당국에서도 이걸 받아들여서 지금은 열차와 기차 명칭을 섞어서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철도차량(rolling stock)과 기차(혹은 열차, train)를 구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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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바퀴(차륜, 車輪)가 빠른 속도로 철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바퀴 안쪽에 플랜지(flange)라고 부르는 턱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플랜지 덕분에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힘이 작용해도 기차바퀴는 궤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된다. 물론 커다란 충격으로 양쪽 바퀴가 떠서 궤도를 벗어났을 때에는 플랜지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상적인 운행을 할 때에는 기차바퀴를 포함한 차축과 그 위에 얹혀 있는 차량 및 적재물(여객 또는 화물)의 무게로 기차바퀴는 철길에 밀착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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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19세기 말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철도를 놓을 때 일본식 협궤를 채용하지 않고 국제표준규격을 따랐던 이유는 대륙철도와의 연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남북철도 연결이며 대륙철도 이야기가 큰 관심사가 된 요즘에는 대륙철도라고 하면 쉽게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한 유럽행을 떠올리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경부선과 경의선을 통한 중국 안둥[安東, 지금의 단둥]으로의 접근이 가장 일반화되어 있는 국제철도노선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중남미 지역이 저마다 다양한 궤간을 사용하는 이유는 나라별로 다양한 자연환경과 경제력도 문제가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단절을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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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건널목을 건너다가 갑자기 차가 멈췄다거나 태풍으로 전봇대가 선로 쪽으로 기울었다거나 해서 열차운행에 명백한 지장이 예상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경찰이나 인근 역에 전화해서 신고할 수도 있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해당 기찻길의 궤도회로를 끊어주는 것이다. 곧 철사나 철근, 쇠파이프 등 전기가 통하는 기다란 물체로 궤도 양쪽을 연결하면, 그 순간 궤도는 끊어져서 마치 차량이 그 궤도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동시에 해당 신호기에는 정지신호가 현시된다. 해당 구간을 담당하는 관제사는 해당 구간에 이상이 있음을 인지하고 현장직원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하고, 그 구간을 지나야 할 기차가 있다면 언제라도 정차할 수 있는 속도로 주의하여 운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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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타고 다니는 고속철도차량(KTX)을 뜻한다. 또 하나는 고속철도차량이 운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포괄적인 고속철도 시스템을 뜻하기도 한다. 고속철도가 달리기 위해서는 고속차량과 궤도와 전차선로뿐만 아니라 신호, 통신, 보안, 운영 등 각 분야의 첨단기술이 유기적으로 통합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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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기차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모가(Mogul)’라고 부르는 증기기관차이다. 이것은 미국의 브룩스(Brooks Locomotive Works)라는 회사에서 만든 소형기관차인데, 당시 일본은 아직 증기기관차를 만들 수 없었다. 1899년 6월, 경인철도합자회사는 미국으로부터 이 기관차를 사서 배편으로 인천에 들여왔으며, 인천공장에서 조립을 마친 후 시운전에 들어갔다. ‘거물(巨物)’이라는 뜻의 ‘모걸(Mogul)’을 ‘모가(モ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철도차량의 모델명을 일본글자인 가타카나 두 음절로 줄여 쓰는 것이 당시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 p.97
용산역에서 동인천까지 운행하는 경인선 급행전동열차를 애용하고 있는 수도권 지역의 현대인들은 경인선에 급행열차가 생긴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철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구로역에서 동인천역까지의 복복선화가 2005년 12월 마무리되었으니 그 즈음에 급행열차가 다니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노선에 최초의 급행열차가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5년도 더 지난 1903년 7월 1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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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차의 종류를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탄수차 유무와 바퀴 배열을 가지고 나누는 방법이다. 증기기관차는 물을 끓여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그 팽창압력으로 왕복운동과 회전운동을 일으켜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물과 땔감(석탄 또는 기름)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물과 땔감을 싣고 다니는 차량을 ‘탄수차(炭水車, tender)’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탄수차를 기관차에 연결해서 다니는 방식을 텐더(tender)식, 별도의 탄수차 없이 자체적으로 물과 땔감을 싣고 다니는 방식을 탱크(tank)식이라고 부른다. 대체적으로 탱크식은 단거리용으로 만들어진 소형 증기기관차에 쓰였고, 대부분의 중·대형 증기기관차는 텐더식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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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월에는 열차 이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노선별열차등급별로 붙이던 명칭이 노선과 관계없이 열차등급별로만 구분하도록 바뀐 것이다. 예를 들어 특급열차라고 해도 경부선에서는 통일호, 호남선에서는 풍년호, 전라선에서는 증산호, 중앙선에서는 약진호로 불렸는데, 이 모든 특급열차가 ‘특급(特急)’이라는 이름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특급과 초특급열차인 새마을호 사이에는 ‘우등(優等)’열차가 새로 생겼고, 특급과 보통 사이에는 ‘보급(普急)’이라는 열차 이름이 생겼다. 또 이와 함께 일반적으로 ‘완행’이라고 부르던 각역정차열차에는 ‘보통(普通)’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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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관문으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조만간 현실로 다가올 대륙철도 시대에는 동북아 철도물류 소통의 허브가 될 역이다. 1899년 9월 18일, 기차가 한반도에서 첫 기적을 울릴 때엔 서울역이 없었다. 아직 한강철교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역은 설계도에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 이듬해인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될 때, 서울역은 ‘경성역’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경성(京城)’이라는 명칭이 일제강점기에 주로 사용된 명칭이라는 것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으나, 실제 이 역명은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가 경인철도를 설계할 당시에도 사용된 명칭이다. ‘경성’이라는 역명에 부기되었던 영문명은 ‘Seoul’이었다.
--- p.189
철도에서 간이역이라고 하면, 첫째 역장이 배치되지 않은 역으로 운전취급을 하지 않고 여객취급만 하는 곳을 말한다. 아무리 역의 규모가 작고 초라해 보여도 역장이 배치된 역은 간이역이 아니다. 이 간이역은 다시 역원배치간이역과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나뉘는데, 역원무배치간이역의 영업(승차권 발매, 승하차 안내)은 차내 승무원이 담당한다. 민간에 위탁운영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역장이 배치되어 있는데도 간이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전철이 운행되고 있는 대방역이나 신길역, 신도림역처럼 역장이 배치되어 있으나 열차 교행이나 대피 등 운전취급을 전혀 하지 않는 역을 ‘운전간이역’이라고 한다.
--- p.218~220
에드몬슨은 뉴캐슬&칼라일철도(Newcastle and Carlisle Railway) 회사의 밀튼역 역장으로 재직할 때 기존 수기식(手記式) 승차권이 위조 등으로 문제가 많은 것을 느끼고 새로운 형태의 승차권과 그 인쇄기계를 발명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혹은 운영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지만, 대체적으로 두꺼운 직사각형 종이 앞면에 출발역과 도착역·열차등급·운임 등을 인쇄하고 뒷면에는 승차권 일련번호가 찍혔다. 승차권 발매 시 일부기를 통해 승차연월일을 날인했으며, 열차번호와 호차, 좌석번호는 손으로 적어주는 형식이었다.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의 철도승차권은 이러한 에드몬슨식 승차권으로 시작됐다.
--- p.231
1905년부터 시작된 국유철도 운영기관의 종사원양성 훈련과정(철도학교)에서 여성의 입학이 처음 허용된 것은 1990년부터였다. 이에 따라 1992년 2월 11일, 철도전문대학은 네 명의 첫 여성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모두 운수 영업 분야였다. 1994년 3월 1일에는 최초의 여성 열차차장이 세 명 탄생했다. 세 사람 중 두 명은 1992년에 철도전문대학을 졸업한 직원이었다. 당시의 차장(車掌)은 간부는 아니지만 자격시험을 거쳐야만 발령을 받을 수 있는 등용직이었다. 운수직의 차장은 운전직의 기관사, 기술직의 수장(지금의 선임장)과 같은 직위에 해당되었다. 차장은 화물열차, 보통열차(비둘기호), 전동열차에 단독승무하거나 급행여객열차에 승무하여 여객전무를 보좌했다.
--- p.277
‘연락운송’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환승체계(換乘體系)’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교통시스템이 바로 이것인데, 교통카드 한 장을 가지고 도시철도 각 운영기관과 버스를 오가며 환승할인을 적용받는 것이다. 이런 연락운송이나 환승체계가 가능하게 된 데에는 IT기술의 발전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수천만 명의 이동 패턴이 가감 없이 전산기록으로 남고, 이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사후 정산(精算)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이러한 시스템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 p.328
지금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철도 연결과 대륙철도가 큰 관심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 전쟁으로 끊어졌던 경의선은 이미 연결돼 2007년 시험운행을 마쳤고, 그 후 1년간 화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문제는 경원선과 동해선 연결이다. 그리고 연결된 후에는 북한의 열악한 철도 인프라를 대폭 개량해야 한다는 더 큰 숙제가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하드웨어 연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바로 연락운송 실현이다. 아무리 철길이 서로 연결된다고 해도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남북철도와 대륙철도는 달릴 수 없다. 억지로 기차를 달리게 한다고 해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다. 코레일이 2015년부터 4년에 걸쳐 시도한 끝에 이뤄낸 OSJD(국제철도협력기구) 정회원 가입은 그래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록 철길은 아직 연결되지 않았지만, 대륙횡단철도 국제노선 운영에 함께 참여하거나 우리 차량을 이용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 철도물류를 수송을 할 수 있는 첫 단추가 제대로 꿰어진 것이다.
--- p.33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