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두항의 검은 그림자」
한라는 청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의 바람 때문에 어릴 때부터 청음 훈련을 하며 구화를 필사적으로 배워 일반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입 모양을 읽어 상대방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추측하고, 수만 번 연습한 발음을 어눌하게 입 밖으로 내어 보아도 사람들과의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고 더욱 외로워질 뿐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잔뜩 들뜬 아이들 속에 섞여 들지 못한 한라는 좋아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남몰래 수어로 혼자만의 대화에 몰두한다.
소민이도 한라랑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노트 필기를 대신해 주고 한라가 물어보는 것에 일일이 대답해 주다 보면,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쉬는 시간이 끝나 버리곤 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니 몇 번씩 다시 묻게 되고,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면 괜히 미안해져서 알아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소민이와 반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한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라는 보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이던 새빨간 떡볶이를, 혓바닥을 노랗게 물들이던 오렌지 맛 슬러시를 떠올렸다. 점심 급식으로 나온 미트볼 스파게티는 이미 다 소화가 돼 아까부터 허기가 졌다. 한라도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가도 될까?
한라는 눈치를 살피다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하지만 소민이의 표정은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중략)
한라는 바다가 좋았다. 바다는 한시도 똑같은 적이 없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새벽 바다는 짙은 물빛을 띠고 물결도 잔잔하다. 그러다 수평선 아래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면 바람도 깨어난다. 바람은 파도를 일으키고 파도는 쉼 없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한라에게 말을 걸어온다.
‘한라야, 저 수평선 너머에는 말이야. 네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단다.’
태풍이라도 오면 바다는 또 다른 얼굴을 했다. 한라는 궁금했다. 하늘과 바다를 가르며 번쩍거리는 천둥 번개 소리는 얼마나 크기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걸까? 비는 정말 주룩주룩 내릴까? 전깃줄 위에 앉은 저 제비가 날아오를 땐 어떤 소리를 내지? ―16~18쪽에서
「남방큰돌고래」
엄마는 위험하다고 바다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하지만, 온통 바다뿐인 제주에 살면서 물속에 들어가 누리는 자유 시간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한라는 엄마 몰래 물에 들어갔다가 들키는 바람에 호되게 혼이 난 뒤, 남두항을 배회하던 중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해나를 목격한다. 그러나 해나가 물속에서 남방큰돌고래 떼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 하며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는 도움을 요청한다고 생각해 무작정 바다에 뛰어든다. 무사히 바닷속에서 나온 두 아이는 해나네 스쿠버 다이빙 가게 앞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다. 한라는 위험하게 왜 바다에 뛰어들었나며 질책하는 해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는 다이빙 장비를 보면서 눈을 빛내며 질문을 마구 퍼붓는다.
수면 위로 동그란 물거품이 부글거리더니 해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돌고래 떼가 물살을 가르며 해나 주위를 빙빙 맴돌았다. 남방큰돌고래들에게 둘러싸인 해나는 물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파도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도와 달라고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만약 해나가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있는데 듣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한라의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수영복을 입고 오느라 휴대폰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하긴 이렇게 더운 날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라는 저도 모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바다에 몸을 던진 후였다. 수영이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너울거리는 파도 때문에 바닷물이 자꾸만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조류까지 빨라 몸이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요동쳤다.
그렇게 얼마나 헤엄을 쳤을까? 해나가 마스크를 벗고 물 위에 둥둥 뜬 채 한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해나가 놀란 얼굴로 한라에게 물었다.
“너, 괜찮아?”
그건 한라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38~39쪽에서
「살아 있는 소리」
스쿠버 다이빙을 접하게 된 한라는 난생처음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창고를 뒤져 엄마의 해녀복을 찾아낸 뒤 가게로 찾아가지만, 해나는 없고 자신을 해마 강사라고 소개하는 의문의 아줌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해마 강사의 뜻밖의 제안으로 한라는 수어를 가르쳐 주는 대신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게 된다. 지금껏 사람들이 자신에게 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하는 해마 강사 덕분에 한라는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내면에 한층 더 다가선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해마 강사가 가만히 한라 눈을 들여다봤다.
“한라야, 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
한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속에서 부력을 조절하는 중성 부력인가? 아니면 감압?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해마 강사의 말에 한라가 씩 웃었다. 그것만큼은 누가 뭐래도 자신 있었다. 한라는 바다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난 바다가 무섭다. 근데 바다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
해마 강사가 쪽방에서 한라산 그림이 있는 소주 한 병과 요구르트를 들고 나왔다.
“오늘은 축하주를 한잔해야지. 내가 아는 이론은 다 가르쳤어. 문제는 실전이지.”
해마 강사는 바닥에 앉더니 종이컵에다 소주를 따랐다. 한라에게는 요구르트를 내밀었다. 한라는 요구르트를 단숨에 시원하게 들이켜고는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조금 용기가 생겼다.
한라가 수어로 물었다.
“바닷속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려요?”
해마 강사는 종이컵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한라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한라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바닷속에선 내가 살아 있는 소리가 들려.” -62~63쪽에서
「물숨」
이론 교육이 다 끝난 뒤에도 실전 연습을 하자는 말을 않는 해마 강사 때문에 한라는 답답함을 느낀다. 어서 빨리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주인 없는 가게에 몰래 들어가 장비를 차는 연습을 홀로 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앞집 친구인 소민이에게 그 현장이 발각되자 스쿠버 다이빙을 배운다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 혼자 바다에 들어가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만다. 한라의 경솔한 행동은 해마 강사의 화를 돋우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켜 큰 갈등의 씨앗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와중에 할머니까지 사고를 당하고 마는데…….
한라는 할머니의 흐릿한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본 바닷속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한라가 소리 없이 가만가만 입술을 움직였다.
“할망, 이건 할망만 알고 있어야 해. 엄마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약속할 수 있지?”
재차 다짐을 받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할머니가 껄껄 웃으며 손가락을 걸었다.
“할망, 스쿠버 다이빙 알지? 나, 오늘 공기통 메고 바닷속에 들어갔다 왔다. 내가 이제 공기통 메고 들어가서 전복이랑 문어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려 줄게.”
“한라야, 바당속에선 항상 물숨을 조심해야 되는 거라. 네가 가진 숨만큼만 있다 와야 된다이.”
‘물숨’은 물속에서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을 때 들이켜는 숨이다. 해녀들은 첫 물질을 시작한 아기 해녀들에게 항상 물에서 쉬는 숨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빨리, 더 많은 해산물을 채취하기 위해 욕심을 부렸다가는 ‘물숨’을 먹게 된다고 했다.
한라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검게 그을린 손으로 한라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한라가 언제 영 커신고. 착허다, 착해.”
할머니는 오랜 물질로 귀가 어두웠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한라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들었다.
‘할망, 바닷속에선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해. 나도 그곳에선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아!’
할머니에게 이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 안다는 듯 소리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84~85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