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수 세기를 지배해온 정권들이 빗자루에 쓸리듯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이탈리아반도에서는 교황권과 종래의 권력이 장악해온 구세계가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 근대 산업과 과학, 상업의 추종자들이 낳은 이종異種의 후손을 불편한 심정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옛것과 새것을 지키려는 자존심 센 투사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대를 경계했다. 양 진영은 각자의 깃발을 흔들면서 자기들만의 진리를 읊조렸고, 각자의 우상을 숭배하고 각자의 영웅을 찬양했고, 각자의 적에게 경멸을 퍼부었다. 혁명가들은 억압받는 현재와 사뭇 다른 유토피아적 미래를 꿈꿨다. 자유주의자들은 입헌통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 질서를 그렸다. 심지어 보수주의자들마저 구질서가 더 버틸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들이 태어나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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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이 한껏 실리를 취한 것은 새로이 얻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통해서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도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계몽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점점 거세진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한몫했다. 유럽의 유대인은 그들이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오래전부터 품고 살아왔지만, 자신들을 지배하는 세속군주들의 행보에 영향을 줄 만큼 힘을 결집시키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고 타지역 동포를 돕기 위해 개입하는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유대민족의 결집력에 정치적 영향력이 더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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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들어 국제정세가 극변했다. 교황이 세속지배를 계속하게 내버려둘지, 더불어 유럽 한복판에 신권국가를 유지하는 게 과연 현명한지를 놓고 논쟁의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피에몬테에 있는 그의 수상 카보우르 백작부터 런던에 망명중인 혁명적 민족주의자 주세페 마치니까지 다양한 세력이 교황권의 신뢰도를 허물기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여기에 종교의 자유나 정교분리 같은 계몽주의 사상까지 확산되면서 대중의 여론을, 비록 상류 엘리트층에 한정된 여론이지만, 점점 변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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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타라 사건을 정치적 자산으로 써먹기에 사르데냐 왕국 수상이자, 주변 땅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영토로 합병시켜 이탈리아를 통일한다는 계획의 배후 조종자인 카밀로 카보우르 백작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카보우르는 모르타라 사건을 보면서 교황국가의 구시대성을 드러내줄 완벽할 도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가톨릭교도?적어도 근대화 물결과 평등권, 기본권 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가운데 교황지배 옹호 세력을 허물고, 유럽 전역에 걸쳐 폭발 직전인 개신교의 반교황권 정서를 불타오르게 하는 데 이용하기 딱 좋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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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인 하녀와 상점 주인, 그리고 볼로냐의 한 유대인 꼬마에 얽힌 이야기가 이탈리아와 가톨릭교회 역사의 방향을 바꿔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 황당한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 이탈리아 마을 광장들을 장식한 조각상이 된 리소르지멘토 영웅들보다 안나 모리시?성적으로 문란하고, 찢어지게 가난하며,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가 이탈리아 통일에 훨씬 많이 기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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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마리아가 루르드에서 어느 가톨릭 신자 앞에 발현한 1858년에는 사실 두 건의 기적이 발생했다. 하나는 프랑스 마을 루르드에서 일어난 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유대인 가족 품에서 막 납치된 한 소년, 며칠 안에 평범한 상인 집안 여섯째 자녀의 미천한 삶에서 교황과 국무원장, 각국 대사, 한 국가의 수상, 심지어 잠깐에 불과하지만 한 나라의 황제마저 안녕을 걱정해줄 정도로 최고의 유명세를 누리게 될 소년 앞에도 성모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p.541
역사가의 관점에서 모르타라 사건은 여러모로 새 시대를 여는 발전상과 연계되어 있어서, 이탈리아 역사상 하나의 중대한 전환기에 활동했던 중심 세력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황청의 세속지배권 집착 배경이 된 세계관이나, 교황청이 19세기 유럽에 퍼진 자유주의적, 세속적 이데올로기와 충돌한 과정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건은 없다. 뿐만 아니라 통일을 목표로 한 투쟁에 함께한 수많은 주요 인물이 모르타라 사건에 어떻게든 얽혀 있어서, 교황 피우스 9세와 국무원장 자코모 안토넬리, 카밀로 카보우르 백작,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같은 결정적 인물의 당시 심리적 태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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