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획은 공공(公共, public)의 영역에 기독교가 참여하는 일과 관련해 신학적으로 유효한 근거를 찾고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네비게이토 같은 선교단체와 미국 복음주의의 하위문화(subculture)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과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크게 강조하는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 줄곧 노출되어 왔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삶의 방식에서, 문화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그러한 활동이 분명하게 기독교적인 경우에만 장려되었다. 다시 말해 그런 활동에는 복음주의적이거나 영적인 교화를 목표로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행동을 비롯해 여러 방식의 사회적인 참여들이 지닌 가치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상황들에 대해 나는 매우 실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를 사회와 문화에 속한 것들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에 참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를 긍정하는’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트리니티에서 공부하는 중간 무렵에, 두 분의 교수님이 문화와 공공의 삶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나를 이끌면서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년)라는 네덜란드 사람의 책, 특히 Stone Lectures on Calvinism을 소개해 주었다. 문화신학(culture theology)에 관한 카이퍼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당시 내게 꼭 필요했던 산소로 호흡하는 것과도 같았다. 카이퍼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라도―인종에 관한 그의 견해에 있는 문제가 두드러지는 예다―, 나는 칼뱅주의를 공공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격려할 뿐만 아니라 요구하기까지 하는 삶의 체계로 보는 그의 시각에 매료되었다. 스톤 강연에서, 카이퍼는 창조 질서의 모든 측면에 기독교가 참여해야만 하는 근거와 동력으로서 일반은혜 교리를 제시했다. 이 교리에 관해 읽으면서 나는 창조세계에 관한 기독교의 긍정을 처음으로 접했다. 카이퍼가 타락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그가 운명론에 빠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세계가 혼돈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과, 기독교인들에게 창조세계 안에 잠재해 있는 가능성들을 개발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인의 행동을 촉구하는 카이퍼의 요청에 깊이 공감했다.
카이퍼가 말한 것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령론과 공공신학에 관한 카이퍼의 접근방식을 현재 시대에 비추어 재상황화(recontextualization)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카이퍼의 성령론과 공공신학을 일관성 있게 재상황화하는 것은 그의 통찰을 현재로 끌어오는 길을, 그리고 다가올 수십 년 동안 보다 심도 깊게 사용할 수 있게 기초를 놓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의 책이 과거로 잠깐 외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런 시도가 꼭 필요하다.
성령론의 영역에서 나는 특히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역할을 다루고, 또 그 결과로 문화개발, 환경, 그리고 정치 일반과 같은 영역들에서 공적인 함의에 관해 숙고했던 저자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성령론에 관한 전형적인, 특히 내게 익숙한 복음주의의 진영에 속한 접근방식이 아니다. 오순절 교회, 은사주의 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the Third Wave) 등이 지난 세기에 성령에 관한 교리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했다. 하지만 성령론에 관한 책들 대다수가, 또는 조직신학의 책들에서 성령님과 관련된 부분이 다루고 있는 초점은 구원론에서 말하는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요한 쟁점들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신자들에게 적용시키는 방법을 더 잘 이해하게 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내가 초점을 두는 것은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에 접근하되, 분명하게 구속적이면서도 또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를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개인들을 구속하는 방식을 새롭게 숙고하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정치에서 문화와 환경 윤리에 이르기까지―책임 있는 참여를 어떻게 촉발시키는지를 이해하고 드러내는 것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성령님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그래서 창조 질서와 신중하게 상호작용하는 데 필요한 신학적인 근거에 도달하는 길을 찾고 있다. 이러한 성령론적인 연구는 나로 하여금 기원에 관한 쟁점과는 다른 면에서 창조 교리를 이해하는 접근방식을 고려하도록, 그래서 창조세계와 역사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현대의 사유 중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게이코 뮐러-파렌홀츠(Geiko Muller-Fahrenholz), 그리고 마크 월러스(Mark Wallace) 같은 인물들은 특히 성령론, 환경, 그리고 사회정치적 참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최근의 접근방식을 밝히는 나의 연구에서 한 줄기를 차지한다.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이 자연세계에 접근하는 특별한 방식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질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특별히 환경에 대한 관심사가 현대의 사회정치적인 지형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함의에 관해서는 다소 성찰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콜린 건톤(Coin Gunton), 클라크 핀녹(Clark Pinnock), 그리고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 중요한 접근방식들을 설명해 준다.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의 존 볼트(John bolt)는 제4장에서 주요한 대화 상대자인 아놀드 판 룰러(Arnold A. Van Ruler)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 독특한 성령론적인 관점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범주들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비록 그의 책이 구원론에 강조점을 두기는 하지만, 그것은 창조세계에 대한 나의 관심에 적합했을 뿐 아니라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에 관한 카이퍼의 교리를 현대화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한 영역들에 기여하게 되기를 바란다.
첫째, 나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싶다. 미국에서 카이퍼는 사상가(a man of ideas)로 이해되는데 반해, 네덜란드에서 그는 우선적으로 역사적인 인물(a historical figure)이다. 비록 이 책에서는 주로 카이퍼의 사상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역사적인 인물은 특히 그의 공공신학에 관한 평가에서 나타난다. 나는 이 책이 네덜란드의 유산인 교계와 학계를 넘어 카이퍼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들추어 낼 뿐만 아니라 이 복잡한 사
람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시켜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 나는 이 책이 성령론 분야에 기여했으면 한다. 완전한 삼위일체 신학은 성령님의 사역이 단지 구원론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을 필요로 한다. 창조세계에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비구속적인 사역은 중요한 것으로서, 신학적인 성찰과 표현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창조세계에서의 성령님의 사역에 관해 성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적 성령론과 공공신학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다.
공공신학은 내가 세 번째로 기여하기를 희망하는 영역이다. 공공신학의 개념을 모든 창조 질서의 청지기직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나는 훨씬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라는 소수거주지(enclave)에서 살아가는 삶을 넘어서도록 도전하는 공공신학의 발전이―주로 복음주의 영역에서겠지만 또한 그 영역을 넘어서까지―시작되기를 바란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교회나 기독교 기관들 외에 다른 영역들에도 책임 있게 관여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회의 발전과 출현을 보게 될 것이다.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