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를 그리워하지 말고 살아 있는 사람을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워하고 싶다. 살아 있는 동 세대 사람들이 살아서 힘을 낼 수 있는 동안 그들에게 가닿는 말로 성원을 보내는 것. 그것이 올해부터의 내 포부다. --- p.19
나와 스승은 딱 띠동갑이라서, 내가 스물다섯 살 때 처음으로 각본을 쓰기 시작한 무렵 고레에다 감독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조금 더 젊었다. (…) “20대일 때 감독을 해”라는 것이 이 세계로 들어온 당초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스승의 말이었다. “할 수 있을까요” 하며 꽁무니를 빼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30대의 감독이 하는 말이었으니 조금이나마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 p.45
창작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이디어, 열정, 재능, 자신감, 돈, 애정, 분노, 희망, 욕망, 선망, 인망, 그 외 이것저것이 있겠지만 “고독은 인간의 고향이다”라고 했던 사카구치 안고의 말대로 외로움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고독과 마주하는 순간이 없으면 창작자 내면의 영혼은 이야기에서 춤추지 않는다. --- p.47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불에 그을린 듯 볕에 타 있어도 그녀들은 상대에게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고 온갖 표현으로 쾌활하게 알아듣도록 설명했다. 눈 안쪽에 체념이나 분노가 배어 있는 광경은 본 적이 없으며 나에게나 감독에게나 똑같이 존댓말을 썼다. 페인트투성이의 헐렁한 옷이라도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걸치고서 그녀들은 틀림없이 그곳을 자기 자리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컵스카우트를 동경해서 컵스카우트에만 들어가려 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동경했다. --- p.67
내게는 연출 일을 하는 가운데 카메라 앞에 아이를 세우는 것이 가장 불안한 순간 중 하나다.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오디션장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아이는 건전해서 좋다. 저기 있는 많은 어른들이 이렇게저렇게 치켜세워주겠지, 재밌겠다, 하며 기대를 부풀리는 아이를 보는 것은 괴롭다. --- pp.72~73
헤어질 때, 사람들은 그때까지 함께 보내온 어떤 순간보다 더 예민하게 서로 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83
자기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말하는 사람의 눈은 어딘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는 그 빛을 지닌 사람과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 혼자서는 도무지 낼 수 없었던 대담한 용기가 나올 때도 있다. 그 순간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만드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 p.117
혼자서 애쓰는 것만이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 작은 모니터 속에 이상적인 화각이 완성된다. 나는 그제야 N과 서로 눈짓한다. 좋네. 이거네요. 하고 말을 나눈다. 완성된 화면을 보며 N은 진심으로 기쁜 듯한 미소를 띠고 있다. 이 사람은 도망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 p.136
내 작품에 대한 사랑은 그때그때 일단락된 시점에서 열기가 식고, 또 가끔은 혐오로도 바뀌고, 그리하여 서서히 과거의 것으로 변화해가지만 내 안에 기억으로서 잔상을 남기는 것은 역시 이런 ‘관계의 흔적’이다. 누가 칭찬해줬다던가, 숫자가 어떠했다던가 하는 것은 생활을 지탱하는 기반과도 이어져 있겠지만 작품이 내 가슴에 남겨주고 간 선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그 또한 관계가 불러일으킨 이런 작은 말이나 사건이다. --- pp.149~150
저 역시 구제불능의 인간이고 지독하게 절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여전히 기대를 걸고 맙니다. --- p.174
언어는 왜 존재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타자와 서로 이해하고 어울리기 위해서입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닫힌 마음을 홀로 공책에 휘갈겨 써서 해방시켜주는 것도 언어지만, 타자에게 전하고 싶다는 의지가 피어오를 때 비로소 언어는 연마됩니다. 혼자 틀어박혀 사색하는 것처럼 보여도 인간은 그 사색의 언어 저편에 있는 손이 닿지 않는 타자를 공상합니다. 결국 세계에 타자가 없다면 언어도 없지 않을까요. --- p.236
맥주로 넘어가면 안심한다. (…) 얼마나 맛있는 맥주인가에 대해 해설을 늘어놓지 않아도 마실 수 있다. 그게 맛있다. 맛을 설명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행복. --- pp.237~238
나는 그 무렵 취직할 가망이 없어서 갖은 고생 중이었다. “영화 일을 하고 싶어”라고 말하면 회사 면접관도 친구도 쓴웃음을 지었다. (…) 하지만 주인만은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나는 무책임하시네요~ 하며 웃었지만, 주인은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그렇지”라며 유유히 대답했다. 나는 또 웃었으나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 p.252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롤모델이 턱없이 부족하고, 여러 현실적 제약 앞에 자신의 일을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숱하게 있으니까. 그러나 변화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만약 영화감독을 꿈꾸는 소녀가 지금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임순례, 변영주, 노덕, 이경미, 윤가은 등의 이름을 줄줄 읊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밀며 니시카와 미와를 소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