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롯왕 집권 초기, 명성을 날렸던 바리새파 최고지도자 힐렐이 말했다.
“많은 자선이 평화를 가져온다.”
그 후,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처럼 현학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잠언인 양 아이들을 가르쳤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자선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렇게 말했다.
그 후,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갈 수 없듯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랍비들은 학식이 있는 것처럼 위세를 떨었다. 그러자 자기재산을 몽땅 나누어주고 알거지가 된 자들이 생겨났다.
힐렐이 자기 재산의 1/5 이상은 자선에 쓰지 말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제사(예배)하는 방식이다.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면서 학습을 권장했다.
(16페이지)
?
* 바리새인들과 달리, 사두개인들은 부지런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찾아 나선 아브라함 후예답게 지상낙원에 대한 소망을 이어가는 정통파 유대인들이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아무리 고단한 삶을 살더라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살행위를 죄악으로 여기면서 영혼 따위로 위로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어서 간다는 사후 세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현세가 중요하다면서 생명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두개파 사제들은 학습을 강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친 다음, 고향에 돌아가서 스스로 깨닫게 했다.
갈릴리로 돌아간 열두 살 예수도 자연을 관찰하면서 지혜를 터득했다고 봐야 한다. 겨자씨 속에도,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와 삶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17페이지)
?
* 고발당한 예수가 갈릴리 출신임을 알고, 시온 산 정상의 헤롯궁전에 와 있던 안티바에게 가서 죄를 따지라고 보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마땅한 죄명이 없는 단순 사건이었다.
안토니요새를 나온 무리는 예수가 인두세를 내지 말라고 선동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안티바에게 가서는 또 다시 죄명이 바뀌었다.
“이 자가, 유대 왕을 사칭했습니다.”
그 말에 속을 안티바가 아니었다.
“허허허,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 왕을 사칭했다면, 그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것일세. 다른 데 가서 알아보게.”
이렇게 말한 다음, 더 이상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때가 오전10시 무렵이었다.
두 번째로 안토니요새의 빌라도 총독을 찾아갔을 때, 예수는 유대 왕을 사칭한 자로 죄명이 바뀌었다.
인두세 반대에서, 유대 왕을 사칭한 죄명으로 바뀌었는데도 빌라도 총독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가벼운 매질을 하고 방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유대 왕을 사칭한 자를 풀어주면, 당신은 카이사르 충신이 아니라면서 억지소리를 했다.
그 소리에 화가 난 총독이 수감 중인 흉악범 바라바를 대신 방면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엄포성 발언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렇게 하라면서 되레 큰소리쳤다.
머리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총독이 흉악범을 방면했다.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총독으로써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그렇게 되니까 약점을 잡았다고 판단한 무리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왕을 사칭한 저 자를 십자가에 처하시오.”
이때부터 광기와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하면서 ‘십자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축제 기간 중에 민란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총독은 마지못해 십자가처형을 지시하고, 하인이 떠온 물에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관하니 너희가 당하라.”
기고만장해진 누군가가 또 다시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진다.’고 소리쳤다. 이처럼 엄포를 놓으려다가 감정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에 대해서 총독은 자괴감에 치를 떨었다.
그래서 자주색 외투를 벗어서 예수의 어깨에 걸쳐주면서,
“너는 이 시간부터 내가 인정하는 유대 왕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저들에게 가거라.”
그런 다음, 왕의 행차에 시종이 따라야 한다면서, 두 명의 죄수를 함께 십자가에 매달게 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쓴 팻말을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게 했다.
총독은 해묵은 감정을 일시에 드러냈다. 사악한 유대인들을 싸잡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작심했다.
(24~25페이지)
?
* 리비우스는 자신이 만든 연대기, 그러니까 에트루리아의 7대 왕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시작되던 해(BC509)를 원년으로, 『로마 건국사』를 썼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와 임페라토르(황제) 칭호를 받고는(BC27), 리비우스가 생각한 원년보다 244년이나 거슬려 올라가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건국신화와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로마를 건국한 것처럼 다시 쓰라고 했다.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 142장에서,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건국신화는 계획에도 없었다.
갈리아인의 로마 약탈(2장~5장),
삼니움과의 전쟁(6장~10장),
이탈리아 반도의 정복(11장~15장),
포에니 1차 전쟁(16장~20장),
포에니 2차 전쟁(21장~30장),
마케도니아와 페르세우스 전쟁(31장~45장),
동맹시 전쟁(46장~70장),
내란과 마리우스 죽음(71장~80장),
내란과 술라의 죽음(81장~90장),
폼페이우스의 개선(91장~103장),
공화정 말기(104장~108장),
내란과 카이사르 암살(109장~116장),
악티움 해전(117장~133장),
드루수스의 사망(134장~142장).
이처럼 142장까지 썼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인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로마를 건국한 것처럼 건국신화를 첫머리에 넣으라고 했다. 그렇게 되니까 『로마 건국사』는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리비우스는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와 문화를 부각시키려고 글을 썼다.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훌륭한 집정관들과 민중을 선동하면서 내란을 부추긴 별 볼일 없었던 세력들과 비교하면서 어느 쪽이 더 옳았는지 분별력을 높이려고 글을 썼다고 서문에 명시했다.
그런데, 건국신화를 집어넣게 되면 근본 취지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막무가내로 건국신화를 넣으라고 했다.
그 바람에 리비우스는 저술 의욕을 잃고 말았다.
드루수스 사망 이후(BC9)의 역사를 더 이상 쓰지 않았다.
게르만족과 싸우던 로마군 17,18,19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 바루스가 현지에서 자살(AD9)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3년이나 더 살았으면서도 황제의 행적을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생뚱맞은 내용을 9권에 집어넣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서 로마와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의 건설에 앞서 일어난 전설들, 또는 그것이 건설된 것은 역사가의 확실한 기록보다 시인의 창조로 꾸며지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건국신화를 도입부에 집어넣게 해서, 『로마 건국사』를 한낱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는 후대의 역사가들은 리비우스의 가상 역사서 운운한다.
(221~22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