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졌다.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이 사람이 자신을 풀어주도록 뭔가를 말해야 했다.
“제발, 부탁할게요.”
엠마는 엉엉 울었다.
“제발, 해치지 마요. 아픈 건 질색이에요. 이렇게 애원할게요. 제발!”
엠마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렇게 슬피 울어본 적이 없었다. 이만큼 겁을 먹은 적도 없었다. 이 남자는 뭔가 나쁜 짓을 할 게 분명했고, 엠마 자신은 그걸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게 뻔했다. 그런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과거의 그녀는 이제 곧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엠마는 이 모든 걸 견뎌낼 게 분명했다. 분명히 살아남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건…… 그건……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운명 지어질 까닭이 없어서였다. 삶이 이제 끝나려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엠마는 더 크게 울었다.
“제발…….”
엠마는 큰 소리로 애원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병 주둥이가 엠마의 입을 파고들었다.
“물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병 끝 부분을 들어 올렸다. 입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엠마는 이 남자를 증오했지만 갈증이 너무 심해서 물을 순순히 받아 마셨다. 남자는 엠마가 몇 모금을 더 마시기 전에 병을 잡아 뺐다.
“곧 더 마시게 될 거야.”
“당신, 당신은 누구세요? 날 어쩌려고 이러는 거예요?”
“질문은 받지 않아.”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테이프 같은 게 다시 그녀의 입을 뒤덮었다.
“기운은 뒀다가 나중에 쓰라고. 다음 주 내내 널 위해 매우 특별한 걸 준비해뒀으니까. 그리고 이런 것들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남자는 칼날을 엠마의 옷 속으로 집어넣은 뒤 옷을 자르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쿠퍼는 기어를 주차에 넣고 차고 문을 닫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빌어먹을 자동 개폐기가 고장 난 게 벌써 두 달 전인데, 서비스업자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부품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바닥을 통해 이미 달궈진 땅바닥의 열기가 느껴졌다. 차고 문까지 두세 걸음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땀이 흘러내렸다. 얼굴에 와 닿는 희미한 산들바람도 당장에 불이 붙기라도 할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한 주일 내내 사람들은 반팔 소매 옷을 입고, 인내심이 바닥난 채 걸어 다녔다. 길 맞은편에 사는, 파도타기나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는 녀석이 피우는 마리화나 냄새가 풍겼다. 이 녀석은 우연히 맞은 복권 당첨금으로 아침이나 밤이나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연처럼 높이 날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쿠퍼의 셔츠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땀에 젖어 늘어졌다. 엄지손가락과 열기에 너무 정신이 팔렸던지 서류 가방을 무의식중에 들고 내렸다.
“기묘하군. 왜 이걸 들고 내렸지?”
그 말을 중얼거리며 쿠퍼가 자신의 차로 돌아왔을 때 더 기묘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 하나가 차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만.”
그 말을 하는 남자는 분명 삼십 대 중반 같았는데, 쿠퍼에게 아직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마로 흘러내린 찰랑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일 수도 있고, 이십 년 전에나 유행했던 코듀로이 바지 때문일 수도 있었다.
“지금 몇 시죠?”
“잠깐만요.”
쿠퍼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바로 그 순간, 가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폭발했다. 쿠퍼가 반사적으로 서류 가방을 힘껏 몸 쪽으로 잡아당기는 바람에 서류 가방의 입구가 벌어져버렸다. 내용물이 진입로에 쏟아졌고, 잠시 후 손발과 근육을 통제할 수 없게 된 쿠퍼도 그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고통이 복부와 다리를 거쳐 사타구니 쪽으로 번졌지만, 그 대부분은 가슴에 몰려 있었다. 남자는 총구를 내리고 눈을 덮은 머리카락을 걷어내고는 쿠퍼 곁에 쭈그려 앉았다.
“곧 괜찮아질 거예요.”
어린애 같은 녀석이 말했다. 적어도 쿠퍼는 그렇게 들었지만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화학약품 냄새를 풍기는 뭔가가 얼굴을 뒤덮었고, 쿠퍼는 전혀 반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밀려왔고, 쿠퍼는 더 이상 컬렉션에 관해 생각할 수가 없었다.
--- pp.3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