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솟구쳤다. 바람이 어지럽게 날뛰었다. 우레와 폭우가 쏟아졌다. 배가 사방으로 까불었다. 키질하듯 흔들리는 세 척의 배 안에서 목숨 일백이 놀아 움직였다. 눈알이 뒤집힌 사람들의 콧구멍과 목구멍에서 삭다 만 밥알이 쏟아졌다. 사람과 짐짝이 엉겨 나뒹굴었다. 이물에 선 사공 박춘달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바다가 끓는다. 노를 놓아서는 안 되네. 최대한 멀리 나아가야 하네.”
사공이 멀건 거품을 토하며 소리쳤다. 파도는 이물과 수백 수천 번 맞붙었다. 배는 속절없이 겉돌았다. 저잣거리의 난잡한 욕지거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죽음의 바다 위에서 힘줄이 터지도록 노질을 해대는 사내들의 내일이 사나웠다. 사공은 이물에서 고물까지 굴러 가 간신히 붙어 있었다.
--- p.12
규원은 섬 어딘가에 있을 왜놈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보다 먼저 섬을 훑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보다 섬을 더 잘 알 것이었다. 그들의 발자국이 섬 곳곳에 지문처럼 눌러 붙어 주인 노릇을 했을 것이고, 주인과 침입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섬은 있는 대로 내어주었을 것이다. 반출된 자원은 왜놈의 나라에서 후한 금으로 거래되었을 것이고, 왜놈을 위해 아낌없이 쓰였을 것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취한 그들은 부유했을 것이고, 제 것을 제 것인지도 모르고 도둑맞은 조선은 가난했을 것이다. 규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빴다. 목구멍에서 덥고 날카로운 말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섬 곳곳에 왜놈의 언어가 어지럽게 들어박혀 조정을 조롱하고 능멸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규원은 그토록 힘겹게 바다와 싸웠던 이틀 낮밤을 떠올렸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꽃과 나무 향기가 났다. 향기 어느 즈음에서 까마득한 왜놈들의 얼굴이 스쳤다.
--- p.33~34
유연호는 잠들지 않았다. 낱장으로 그린 그림들이 한 장의 종이 위에 퍼즐을 맞추듯 제자리를 잡아 나갔다. 붓끝에 걸린 그의 감각이 새하얀 종이를 생생히 채웠다. 점잖고 단아했던 그는 밤새 지지리도 궁상맞은 몰골이었다. 그의 그림은 가냘픈 듯 풍성했고, 실물을 얹어놓은 듯 섬세하면서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유연호. 평소 그는 혼자 떠돌다가 끊임없이 생각에 잠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말미에 뭔가를 그리곤 했는데 죽죽 그어지는 붓놀림에 소리의 조화가 쏟아졌고, 음영의 밝기가 경계 없이 번졌다. 바람이 흘러가는 소리, 새가 울고 꽃들이 피고 지는 소리, 빗방울의 굵기, 구름의 농도와 대지의 내음까지도 제법 밀도 있게 되살아났다. 그림은 그를 닮아 결이 세세하고 날카롭고 단단했다. 그의 그림에는 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보아도 유연호만의 그림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떠나오기 전 임금이 그를 불러 일렀다.
“화원, 그대의 그림을 익히 눈 여겨 보았네. 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해(大海)의 섬이 궁금하여 친히 그대를 천거한 것이니 세세히 그려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도록 하게.”
유연호는 섬에 든 날부터 수천 년 시간을 보고 듣느라 편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한 밤중에도 터질 듯 밀려드는 섬의 영감이 그를 사정없이 뒤 흔들었다. 코피를 쏟거나 먹은 것을 게워냈다. 그리고는 홀린 듯 그려나갔다. 그의 그림에는 알 수 없는 아련함, 보이지 않는 이끌림이 서려있었다. 오랫동안 비워진 채 숙성된 섬의 언어와도 같았다. 규원은 그런 유연호를 재촉 하지 않았다.
칠흑의 밤, 그만의 기법은 아득한 이끌림으로 되살아나 종이 위에서 분출하였다. 먹 선은 산 능선을 타고 기어 내려와 물속에 잠기는 듯싶다가 다시 기어올라 선명하게 산과 바위를 일으켜 놓았다. 산과 기암괴석이 밤새 종이 위에 적당하게 올라와 있었다.
--- p.194~195
절박함에 수천 리 물길을 건너온 사람들의 삶은 헐거웠으나 더불어 희망할 만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히 이 섬에 남아야 하고, 그들이 남음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서로 복될 것이었다. 당대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들 앞에 규원의 마음엔 조금씩 연민이 일었다. 자신에게 움막을 내어주고도 누추함에 몸을 들지 못하던 그들은 좁은 움막에서 서로 부대끼며 단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규원은 밤새 그들의 고단함이 마음에 걸렸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엎드려 사죄하던 그들의 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국법이란 백성이 최소한의 먹고사는 것 후에 있을 것이었다.
규원은 국법에 의해 강제로 섬과 작별한 옛 사람들과, 섬을 잊지 못해 목숨을 다하여 대해(大海)를 건너온 악착같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조정은 비겁했다. 섬을 비우고 그 후 어떠한 긍정도 내어놓지 못했던 역사의 오류 앞에 규원은 어떠한 말로도 응답할 수 없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 p.146~147
검찰사 일행이 2일 저녁 무렵 도착한 태하리엔 울릉도 수토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태하는 조선시대 수토관들이 주로 상륙했던 곳이다. 수토관의 흔적도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태하항 왼쪽 바위 절벽 아래 곳곳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801년과 1805년 각각 수토관으로 왔던 삼척영장 김최환·이보국과 그 일행의 이름을 새긴 ‘태하리 각석문’이다.
울릉군지 등에 따르면 태하항 오른편에도 각석문이 있었으나 개발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30년과 1847년 각각 울릉도를 다녀간 삼척영장 이경정·정재천의 기록이다. 이 마을에 사는 박해수(87) 씨가 각석문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50년쯤 전이었어. 항구 만들고 길 낸다고 다 부숴버렸지. 그때 발파를 반대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타박을 마이 줬어. 먹고살기도 힘든데 마을 발전이 먼저라고 생각했지. 그놈을 그냥 뒀어야 했는데….”
--- p.39~40
이날도 검찰사 일행은 포구에서 조선인을 만났다. 일행이 울릉도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각 포구나 숙영지엔 늘 조선인이 있었다. 울릉도 도착 6일째인 이날까지 검찰사가 직접 만난 조선인은 93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배를 짓거나 미역을 땄고, 성인봉 주변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캤다.
이보다 100년 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16년 11월 국립해양박물관이 번역해 출간한 ‘라페루즈의 세계 일주 항해기’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87년 5월 29일의 기록이다.
‘조선 해안에서 약 20리외 정도 떨어진 섬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중국 선박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 배를 건조하는 작업장을 발견했다. 일하던 사람들은 단거리 포의 사정거리까지 접근한 우리 함선을 보고 놀랐는지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들은 육지에 사는 조선 목수로 여름이면 섬에 식량을 가지고 와서 배를 건조한 후 본토에 가져가 판매하는 것 같았다. …섬의 서단을 지났을 때 섬에 가려 우리 함선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작업장의 일꾼들이 나뭇조각을 옆에 두고 배를 짓다가 우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 p.130
다시 학포에 도착한 이규원은 육로 검찰을 통해 확인한 섬의 식생과 특징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토산물은 산삼이다. 송병기 단국대 명예교수의 책 ‘울릉도와 독도’에 따르면 울릉도 산삼은 18세기 중엽부터 잠상(潛商)이 비밀리에 채취한 뒤 육지에 판매했고, 관원들도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캐오도록 할 정도였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정조 때는 울릉도 수토관들이 각 군현에서 선발한 30여 명 정도의 채삼군(採蔘軍)을 거느리고 수토길에 오르기도 했다. 정광중 제주대 교수는 “당시 이규원이 만났거나 울릉도에 머물고 있던 약초꾼 50여 명은 대부분 산삼 캐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울릉도 산삼의 명성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사동에 사는 박창규(76) 씨가 말했다.
“우리 형수가 산삼 마이 캤어. 알봉(마을)이 고향인데 처녀 때 7뿌리 캤다 쿠데. 근데 나중에는 너도나도 산삼 캤다 캐서 가보면 다 가짜인기라. 인삼 심어 놓은 것을 뽑아놓고 산삼이라고 거짓말 한 거지. 가짜배기 팔다 경찰서에 붙들리 가서 직싸게 뚜디리 맞기도 하고. 10명 중에 1명 정도가 진짜였을라. 진짜배기는 두지(뒤주)에 숨겨 놨다가 팔았는데 다들 제값도 못 받았을 기라.”
동물로는 요즘 울릉도에선 거의 보이지 않는 슴새가 대표적이다. 주민들은 ‘깍새’라고 불렀다. “안개 낀 날 마당에 불을 놓으면 불빛 보고 죽자고 날라드는데, 너무 밝아 눈이 멀어가 카는지 그냥 푹 널져 버래. 봄에 명태잡이 나가면 고기 잡은 거 묵을라고 배 주변에 바글바글했어.”
깍새는 먹을 게 귀한 시절 주민들에게 요긴한 식량이 되기도 했다. 박 씨의 부인 정옥선(71) 씨가 말했다.
“고무라 고무. 질겨도 그런 고무가 없다. 껍질 벗겨 오래 삶아야 돼.”
박 씨가 한마디 툭 거든다.
“물(먹을) 게 없어가 묵었지. 맛은 있는데 너무 질겨.”
울릉읍 저동·도동, 북면 천부 등 울릉도 곳곳에 있는 ‘깍끼등 마을’도 깍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깍새는 산란기가 되면 산등성이 쪽으로 올라오는데 바닷가 높은 곳을 ‘깍새등’ ‘각새등’으로 부르다 지금은 ‘깍끼등’ ‘까끼등’ ‘깍깨등’으로 부른다. 북면 섬목 앞에 있는 관음도도 ‘깍새섬’으로 불렸다.
그밖에 이규원이 ‘울릉도 토산물’로 기록한 고양이와 쥐, 지네는 요즘 울릉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예전 고양이와 쥐는 육지의 것보다 몸집이 많이 컸다. 1808년 왕명에 의해 편찬한 ‘만기요람’은 ‘울릉도 산고양이는 개만큼 크고, 쥐가 고양이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 씨 부부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1950, 60년대만 하더라도 들고양이 중 큰 건 ‘중개’(보통 몸집의 개)만 해서 화장실 가기가 얼마나 무서웠다고. 큰 닭도 다 물어갔다. 전란 때 쥐는 또 얼마나 많았노. 농사도 못 지을 판이었어. 그리고 그때는 독수리도 많았는데 병아리를 못 키울 정도였다니까. 병아리 지키라고 아(아이) 이름을 ‘둑술’이로 지은 집도 있었으니까.”
--- p.176~177
서면 태하리에 사는 박해수(88) 씨는 울릉읍 도동에 살다 16살 무렵이던 1940년대 후반 이곳으로 왔다. ‘강냉이밥’을 도저히 먹기 싫어서였다. 당시 태하리는 울릉도를 통틀어 논이 가장 많았다.
“‘논이 젤로 많은 곳이 어데고?’ 물으니 태하동이라 카데요. 벼농사 지어 쌀밥 먹고 싶어 왔는데 쌀밥은 못 먹고 고생만 디따 했지요.”
벼농사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감자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식단은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나리동 처자들은 쌀 한 말 못 먹고 시집간다’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대신 다양한 밥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해조류인 대황을 삶아서 물에 우린 뒤 쌀이나 보리를 섞어 대황밥을 지었고, 명이 줄기를 썰어서 명이밥을 만들었다. 무채를 썰어서 보리 옥수수와 함께 밥을 지은 무밥, 옥수수를 갈아 넣고 쌀이나 보리와 함께 밥을 한 옥수수밥도 마찬가지다. 쌀은 줄이면서 양을 늘리기 위한 방편이었던 만큼, 배합 비율은 집집마다 달랐다.
--- p.28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