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통합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시대는 실질적으로 사라진 기독교 복음의 특정한 차원들의 희생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하지만 현대 세계는 기독교 세계에 반발하면서 그 세계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동일하면서도 정반대인 왜곡들을 물려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하는 것은 현대성에 반발하는 것도, 그렇다고 비굴하게 현대성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현대성은 모든 문화들처럼, 창조 세계의 완성을 위하여 성령에 의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비추는 치유의 빛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대성이 다른 문화들과 다른 것은, 현대성이 처한 곤경의 독특한 특징들이, 일부 이해할 만한 이유에서 그랬을지라도, 그러한 복음을 거부한 데서 나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위한다면, 현대의 거부를 단순히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거부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기독교는 참으로 자연적 인간 지성에 거슬리지만, 기독교를 대변하는 자들 때문에 잘못된 이유에서 거슬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이 복음과 현대 상황을 모두 조명함으로써 둘 사이에 지속적 대화가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서론」중에서
이 책에서 나의 목적은 우리 시대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나는 신자와 비신자가 모두 공유하는 세계를 살피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제공하는 초점을 통해 그렇게 할 것이며, 또한 그 세계의 정체를 파악하고 명료히 밝히는 과정 중에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명하여 이 시대에 적절한 기독교 신학에 이르는 토대를 놓고 싶다.
---「1장 헤라클레이토스부터 하벨까지」중에서
하나와 여럿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철학과 신학의 시초로 데려간다. 이 질문이 논증에 기여하는 바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사이의 유명한 불일치에서 분명히 표현된다. 서양 철학의 이 두 원천의 가르침에 관한 우리의 정보는 파편적이고 종종 모호하지만, 그들은 대표적 인물들로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헤라클레이토스는 다원성과 운동의 철학자다. 여럿이 하나보다 우선적이며, 그것도 실질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파르메니데스는 정반대의 사상을 대표한다. 그에게 실재는 전적으로 불변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이성이 가르치기 때문이며, 이는 감각에 제시되는 외양들과 모순되는 것이다. 실재는 영원히 그리고 한결같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파르메니데스는 탁월하게 하나(the One)의 철학자다. 여럿(the many)은 다만 하나(the One)의 작용들로만 존재한다. …그들 이후로 모든 시대의 사상을 잇는 연속적 주제들 중 한 가지는 이 둘 사이의 다양한 변형들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하나와 여럿의 변증법은 많은 기본적 사유의 소재들에 대한 이후의 생각 대부분을 위해 틀을 제공했다.
---「1장 헤라클레이토스부터 하벨까지」중에서
현대는 존재의 통일성과 의미를 위한 초점인 하나님을 변위시킨 시대다.…하나님은 더 이상 세계의 정합성과 의미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합리성과 의미의 자리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되었다. 즉 이것들이 하나님이나 세계를 변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일하는 의지가 불필요하게 되거나, 혹은 다양한 도덕적·이성적·과학적 이유에서 거부될 때, 사물들의 통일성의 초점은 통일하는 합리적 정신이 된다.…하나님의 변위가 여럿에게 자유와 존엄을 주지 않고 또 준 적도 없으며,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그리고 종종 의식하지 못한 형태의 노예상태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1장 헤라클레이토스부터 하벨까지」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교리에 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기독교 전통 자체는 개인주의적 방향을 취하는 경향이 있어서, 인간 개별성을 영혼이나 어떤 내향성의 소유에 두었다. 이 교리는 인간의 관계성의 한 측면인 수직적 차원을 간직했지만, 다른 측면인 수평적 차원은 간직하지 못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었지, 본질적으로 이웃이나 세계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현대적 신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자유가 우리의 관계성의 한 함수인 상대방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 즉 고대와 현대의 연속성의 척도는 자유가 거의 예외 없이 타자로부터의 자유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을 ‘실현’하거나 ‘성취’하는 것, ‘우리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지, 우리의 이웃과 상호적 관계됨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찾는다는 것이 아니다. 두 시대 모두 개별성을 다룰 때 파편화와 사회적 일원론의 진퇴양난 중 어느 한 가지의 희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2장 사라지는 타자」중에서
소수의 후대의 신학들만 이레나이우스만큼 적절하게 시간과 영원, 하나와 여럿의 통합을 이루어냈다…이레나이우스도 전통에 문제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이 이상화될 것은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그를 경륜에 관한 유망한 설명들을 평가하는 한 척도로 사용한다면 대체로 정도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레나이우스와 대조적으로, 일부 신학들은 구속을 희생하여 창조를 강조할 위험이나 또는 그 반대의 위험에 빠진다. 예를 들면 전형적인 서구 신학은 창조를 경시하고 구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이 점은 많은 최근의 기독론 논의에서?예를 들어,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하여?기독론을 그것이 놓인 더 넓은 맥락에서 분리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것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상이한 신적 경륜 개념들은 결과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됨을 이해하는 상이한 방식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로 다른 강조들은 반대로, 세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을 제공한다
---「6장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해 하나님의 경륜적 개입이 갖는 함축에 관해 물을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가장 분명한 교부적 개념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개념이다. 이러한 전개가 놀랍게 보일 수도 있다. 삼위일체의 가치가 의심되어 온 현대의 삼위일체론 논의들에서, 종종 페리코레시스 개념은 이 교리가 가장 사변적이고 무익한 방식이라는 데 대한 한 사례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를 주장하고 싶다. 페리코레시스 개념은 사유를 위한 모든 종류의 가능성들을 개방한다.
---「6장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중에서
만약 인간들이 삼위일체의 위격들처럼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들이 창조된 점에 힘입어서 휘포스타시스들로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라면, 그렇다면 그들의 개별성도 역시 그들의 존재에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라는 점, 즉 각각 독특하고 상이하다는 점은 불행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다. 균일성을 조장하는 힘을 파괴하는 일은 사람들이 개별적이도록, 참으로 관계 안에서 개별적이도록 만드는 방법들을 발견함으로써 이룰 수 있지만, 이로써 그 관계성 자체가 독특하고 자유롭게 된다.
---「7장 주는 영이다」중에서
우리가…검토한 두 초월자들?페리코레시스와 실체성?이 암시하는 삼위일체론적 개념은 사회성이다. 이것은 사회적 삼위일체 이론이라고 불리게 된, 거의 독립적인 세 신성들을 암시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분명히 이 개념은 단일한 심리의 유비에 근거한 개인주의적 삼위일체 이론들보다는 그런 이론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 개념의 핵심은 공유된 존재에 있다. 위격들은 단지 서로와의 관계들 속으로 들어갈 뿐 아니라, 관계들 안에 있는 서로에 의해 구성된다. 영원히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주고받음에 힘입어 존재한다. 존재와 관계는 사유에서 구별될 수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 관계는 오히려 한 존재론적 역동의 일부다. 일반적 요점은, 존 지지울라스의 말을 사용하자면, 하나님의 존재가 단조로운 통일체가 아니라 친교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의 표현을 각색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면 반드시 세 위격들로 이끌려지고, 셋을 생각하면 공유된 관계적인 존재 개념으로 어쩔 수 없이 유도된다.
---「8장 삼위일체인 주」중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초월성의 본질은 무엇인가?…우리는 사회성이 콜리지적 의미에서 관념의 위상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사회성은 인격적 존재들의 특징적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수적인 개념이지만, 모든 것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인격적 존재들은 사회적 존재들이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그들의 인격적 관계됨 안에서, 즉 그들의 자유로운 타자성-안에-있는-관계 안에서 그들의 존재를 갖는다고 말해야만 한다. 창조 세계의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데, 그것들은 인격적인 것의 표지들 중 일부인 사랑과 자유를 갖지 못한다. 전체로서의 우주에 관해 우리는 그것이 사회성보다는 관계성을 특징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모든 것은 여럿의 그리고 다양한 관계의 형태들에 의해 구성되는 개별자가 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관계성은 초월자로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창조된 인간들과 사물들이 하나님?하나님 자신이 그 본질적 그리고 가장 내적 존재에서 관계 안에 있는 존재다?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표지로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배울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다른 두 초월자인 페리코레시스와 실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얻은 통찰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한다.
---「8장 삼위일체인 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