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근래 들어 신경질을 자주 부리고 짜증이 심해진 엄마였다. 아빠와 결혼을 한 이후로 직장에 다녀본 적이 없다는 엄마. 그런 엄마가 일을 하느라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도 않고 느닷없이 쌀쌀맞게 대하는 엄마가 많이 서운했다. --- p.9
세은이는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크기가 코딱지만 한 방. 전에 살던 서른여덟 평 아파트의 방에 비하면 반 이상이나 줄어든 것이었다. 그런데다 가구와 짐들을 빼곡히 들여놓아 지저분한 창고나 매한가지였다. 여유 공간이 거의 없어 침대에서 창문까지 겨우 두 걸음에 불과했다.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 p.9
아빠 사업이 잘 안돼서 이렇게 되었어! 아빠는 이 년쯤 있다가 돌아올 거야, 돈 많이 벌어서. 엄마도 이제 하루 종일 일을 해서 돈을 벌 거고. 그러면 다시 넓은 아파트를 사서 이사 갈 수 있어. ……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사였기에 세은이는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했다.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고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 p.11
대체 사우디가 어떤 곳이기에 이 년 만에 큰 아파트를 살 돈을 벌 수 있다는 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만약 아빠가 이 년 만에 그만한 돈을 못 벌면 이혼을 하겠다는 건가? 나한테도 드디어 올 것이 온 거야?” --- p.12
급하게 라면을 끓여 다시 안방으로 가지고 가자, 이번에는 반찬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반찬이 없잖아?”
“반찬이 왜 없어? 김치도 있고, 콩자반도 있고, 멸치볶음도 있고, 많은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들이야!”
“얻어먹는 주제에 반찬타령은……. 먹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해!”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예은이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께적거렸다. 이래저래 보기 싫은 동생이었다. 아예 낳지를 말든지, 차라리 나를 동생으로 낳아줄 것이지! 언니로 태어나게 해준 엄마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 p.22
엄마가 방문을 꽝 닫았다. 그 진동에 창문이 우루루루! 떨었다. 이사를 오기 전에는 엄마와의 사이가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 상상조차 못했었다. 집안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져 아예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집이 아니라 얼음나라였다. 마술에 의해 얼음나라로 변한 게 아니고, 가족들끼리 서로 쌀쌀맞게 대해서 그 냉기로 저절로 얼음나라가 된 것이었다. --- p.44
“그렇지 뭐. 나한테 무슨 행운이 있겠어? 중학생이 되자마자 아빠 사업이 망하고, 큰 아파트를 팔고 거지같은 소형 아파트로 이사하고, 밥 설거지 청소 빨래도 도맡고, 중학생이 되면 마음씨 착하고 예쁜 새 친구를 만나길 바랐는데 윤사라 그 끔찍한 악마의 손을 만나고…….”
꼽아 보니 모두가 행운이랑은 정반대인 불운한 것들뿐이었다. 그 불행이 자기한테 한꺼번에 닥쳤다는 사실에 몹시도 화가 났다. --- p.81
“어? 저기! 저기 있어, 엄마!”
형광등 갓 옆에 검은 물체가 붙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엄마가 발꿈치를 들고 눈을 크게 떠서 살폈다. 곧 엄마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 p.117
“님비요? 그게 뭐예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영어로 낫 인 마이 백 야드(Not In My Back Yard)의 준말인데, 혐오시설이 자기 집 근처에 세워지는 걸 적극 반대한다는 거야.”
“혐오시설이요? 특수학교가요?” --- p.213
작은 돌멩이로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 아빠 얼굴, 엄마 얼굴, 자기 얼굴, 예은이 얼굴을 그려놓고서 선을 그어 둘 둘씩 나누기도 하고, 하나와 셋으로 나누기도 하고, 각각 하나씩 나누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방법으로 나누든 한 가족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 p.240
“너희가 아직 어려서 큰 충격을 받을까 봐, 그동안 숨겼던 거야. 아빠가 절대 말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고.”
세은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있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눈앞에 벌어진 것이었다. 나를 속이다니? 엄마 아빠 모두한테 배반을 당했다는 느낌에 울분이 끓어올랐다. --- p.251
왼손을 펴서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게 한 다음, 오른손 손바닥을 펴서 손날로 왼손 손등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이어서 왼손 주먹을 쥔 채 엄지를 세우고 오른손 손바닥을 펴서 엄지 위에서 오른쪽으로 두 번 돌렸다. 인어공주 사라한테 배운 수화였다. 엄마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엄마,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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