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우자를 고르거나 결혼한 후에 겪는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대부분 우리 부모의 선택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심리학자 휴 미실다인은 모든 결혼은 실제로 최대 여섯 명이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결혼 당사자 두 명과 신랑의 부모 두 명 그리고 신부의 부모 두 명을 모두 합하면 최대 여섯 명이라는 뜻이다. ……
많은 경우 우리의 상처는 우리 부모들과 연관되어 있어, 남편이 아침에 신문을 읽든지 안 읽든지 하는 것은 사실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의 부부들이 배우자가 아침 식탁에서 신문을 읽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어린 시절의 상처나 특히 가족이나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들이 치유되면, 결혼이나 그 밖의 현 상황들에서 드러나는 과민 반응들을 치유할 수 있다. 가족 상담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머리 보웬은 그의 정신과 수련의들이 부모에게서 받은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되자 훨씬 우수한 상담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배우자와 함께 정식 상담 과정을 거친 수련의들만큼이나 그들 자신의 결혼 생활도 개선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상처를 남긴 기억 속으로 예수님을 초대할 때, 그것은 예수님께 우리의 과거 자체를 지우거나 혹은 잊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기억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루카 24,13-35). 예수님이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풀이 죽어 있는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아픈 기억으로 슬픔과 실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지난 사흘 동안에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은 다 들어 주셨고, 제자들이 느낀 상처 하나하나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다. 마침내 제자들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서 예수님과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린다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온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우리가 린다에게 왜 우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그토록 화를 내신다는 사실, 그분이 그토록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때문에요. 예수님은 나의 전부를 나누기를 바라세요. 내가 울면 예수님도 우시고, 내가 행복하면 예수님도 행복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린다에게 가장 필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하셨다. 그것은 그녀가 상처와 분노에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린다를 사랑하셨다는 사실과 린다의 분노가 곧 예수님의 분노라는 사실이다. 상처와 분노의 와중에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린다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척들과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에릭슨의 연구를 선호하는 이유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에릭슨은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병리학을 연구했고, 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에릭슨은 인간을 단편적으로만 볼 때는 그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오직 건강하고 통합된 인격을 통해서만 인간에 대한 진정한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에릭슨은 건강한 사람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영성 발전에 내포된 덕의 성장과 인간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
둘째, 에릭슨은 성장이 안 된 단계는 나중에 오는 단계에서 채워질 수 있으며, 또 어떤 것도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에릭슨은 “인간은 성장한 후에라도 교정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고, 또한 아예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막을 수 있는 문제들이 많다.”라고 말한다. 치유 기도의 힘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믿음은 에릭슨이 한 이 말의 진실성에 의존한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님이 치유하실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
마지막으로 우리가 에릭슨의 연구를 바람직하게 느끼는 이유는, 그가 각 성장 단계에서 보일 수 있는 장점과 약점을 흑백 논리로 보는 대신에, 한 가지 선물의 지나친 사용과 미미한 사용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간 성장 첫 단계에서 영아는 기본적인 신뢰심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불신을 배우게 된다고 본다. 하지만 그가 불신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불신을 배우지 못한 어린 아이는 뜨거운 난로를 처음 보는 순간 불에 데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약점이나 죄는 기본적으로 한 가지 선물을 너무 많이 쓰거나 너무 적게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우리의 이해도 에릭슨과 같은 관점이다. 성적인 죄는 예를 들어 친밀함이라는 선물을 과용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에 일어난다고 본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베들레헴에서 품에 안겨 있는 6개월 된 아기인 저를 보았어요. 그 후 몇 주 동안 저는 기도 중에 여러 번 이 이미지를 되풀이해서 떠올렸답니다. 하지만 6개월이나 된 아기가 요셉 성인과 성모님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처럼 보였어요. 베들레헴에서의 예수님은 갓난아기였기 때문에 저도 더 작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저 자신을 작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집중을 하면 저는 제가 얼마만한지를 잊어버리고 다시 6개월 된 아기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몇 주 동안 기도한 후에 저는 아이들이 저를 만지도록 내버려두게 되었고, 제 안에서 화재 경보가 울리는 것 같은 느낌도 사라지게 되었지요. 저는 집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고 어머니에게 “왜 제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6개월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라고 물었지요. 어머니는 “네가 6개월 됐을 때 발진이 생겨서 온몸이 수포로 덮였던 일이 있었단다. 몇 주 동안 우리는 너를 안아 줄 수도 없었고, 그때 네가 너무 아파해서 우리는 심지어 너에게 옷을 입힐 수도 목욕을 시킬 수도 없었지. 누구도 너를 만질 수 없었어.” 그때야 저는 왜 기도 중에 6개월 된 아기로 돌아가야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제1장 영아기 신뢰 대 불신」중에서
어머니는 마이클에게 동생이 죽은 그 장면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다.
“마이클, 네 방이랑 그 구석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니?”
“네.”
“예수님께 너를 그 요람으로 데리고 가서 네가 동생이 죽은 것을 발견한 그날 아침에 요람에 있던 동생을 너에게 보여 달라고 하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어떻게 하시니?”
“예수님은 제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톰이 죽은 것은 제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 애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세요.”
“넌 혹시 네가 학교에 가면 엄마도 죽거나 다칠까 봐 무섭니?”
“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니?”
“그분은 언제나 저를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세요.”
그날부터 마이클은 학교에 가는 것을 더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자립심의 단계에 고착되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고 갈까 봐 생긴 두려움에 대해 “아니야”라고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학교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장 유아기 자립심 대 수치심과 의심」중에서
메리는 아버지나 선생님 그리고 하느님,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는 사람으로 보였기에, 메리는 자신에게 완벽해질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 메리는 완벽한 문장을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과 마음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어 나갔다. 몇 주 동안 사랑이 가득 찬 예수님의 응답을 듣고 난 후, 메리는 글쓰기에 대해서 깊은 두려움을 품게 된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상처를 나누었다. 예수님은 “메리야, 나는 네가 느끼는 증오와 분노를 이해한다. 나도 네가 경험한 절망에 대해 화가 난다. 어떤 아이라도 너처럼 놀림당해서는 안 된다. 선생님은 단지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고, 자신을 잔인하게 다루어 왔기 때문에 너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던 것뿐이란다. 그러나 나는 너의 선생님처럼 하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많은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고 응답하셨다. 예수님께서 메리의 분노를 함께 나눠 주셨기 때문에, 메리는 예수님이 사랑해 주시고 이해해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메리는 이제 그 선생님을 용서할 준비가 된 것이다.
---「제4장 학교 시기 근면성 대 열등감」중에서
아주 오래 전, 한 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밭과 방앗간을 공유하고 낮 동안 함께 거둔 곡식을 똑같이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동생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곡물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나는 나만 돌보면 되지만 형은 아이들도 키워야 하잖아.’ 그래서 매일 밤 아무도 모르게 형의 창고에 자기 몫의 곡식을 쌓아 놓았다. 그런데 형도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곡식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정말 불공평해. 나는 늙으면 돌보아 줄 아이들이 있지만 내 동생은 아무도 없잖아. 내 동생이 늙었을 때를 대비해야 해.’ 그래서 매일 밤 그도 비밀리에 그의 곡식을 동생의 창고로 날랐다. 그 결과 두 형제는 언제나 매일 아침 신기하게 다시 채워진 곡식들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을 향해 가다가 만나게 되었고, 그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에 가득 차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느님은 그들의 만남을 지켜보시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이곳은 사랑의 장소로 곧 성스러운 곳이니, 이곳이 바로 나의 성전이 세워져야 할 곳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알려지게 되는 성스러운 장소는 바로 사람들이 사랑 속에서 서로를 만나는 곳이다.
Belden C. Lane, [Rabbinical Stories]
---「제7장 장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