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촛불항쟁이 지나고, 정권도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들 하나하나의 목소리는 하나의 ‘시민적 주체’가 냈던 목소리로 치환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학문적, 정책적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광장엔, 시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시민이라는 말이 울려퍼지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바디우, 아감벤, 지젝, 이 세 명의 유물론자들에게서 이러한 상황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힘을 너무 과하게 따르지 않으면서 상황을 돌파할 길을 모색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서 말해 주었고, 바울이 주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고 확신 속에 속삭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nothings)의 주체-되기 이야기가 바울의 증언 속에 있다는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이 글은 세월호 이후 시대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인 ‘촛불항쟁’이라는 한국적 상황을 실증적 논의의 장으로 삼아, 주변부의 ‘주체-되기’ 가능성에 관한 물음을 바디우, 아감벤, 지젝 세 명의 철학자들이 논쟁의 정점으로 삼고 있는 ‘바울의 주체 논의의 진정한 쟁점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한국적 상황에서 주체 논의의 방향을 대안적으로 재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핵심은 역시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의 주체성에 관한 정치철학에서의 이해들을 신학과 종교철학의 관점에서 검토하고 논구함으로써 사도 바울이라는 ‘종교적’ 인물이 오늘의 한국 신학에서,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주체적’ 의미를 발굴하고자 한다 ― 바울은 한국에서 새로운 희망일 수 있겠는가? --- 「 한국 사회의 주변부와 바울의 ‘주체-되기’ 」중에서
…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본 장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2016~2017년 촛불항쟁의 주체는 누구인가? 만일 이들이 정말로 시민적 주체라면, 주변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광장의 주체를 시민으로 설정하고 나면, 주변부는 광장에서조차도 주변부로 밀려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세월호 사태와 촛불항쟁을 이어준 것은 주체가 아니라 저항 대상의 중첩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부류의 연구를 상기시킨다. --- 「한국적 상황: 촛불항쟁 논의는 주변부를 현시하는가? 」 중에서
지젝이 바울에게서 보는 주체의 구체성은 아감벤의 바울 해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지젝이 아감벤의 이중부정의 변증법 자체를 승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한다. 다만 그가 보기에 아감벤의 이중부정의 변증법은 “메시아적 경험의 순수한 형식적 구조”에 멈추어서고 말았다는 점에서 이 변증법을 전적으로 승인하긴 어려웠다. 지젝이 기독교의 핵심을 그리스도가 아담의 역설적 ‘반복’이라고 말할 때 떠올린 것은 분명 주체 자신의 구체적인 분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아감벤은 주체의 구체성을 배제한 채 분할의 분할이라는 형식 자체가 갖는 유보적인 성격, 즉 ‘지양’(Aufhebung)에 멈추어서고 만다. 이에 대해 지젝은 단호하다. “시도 바울의 보편성은 말 못 하는 보편성(특정한 내용 없이 자체로는 비어 있는 중립적 그릇)이 아니라 투쟁하는 보편성이다.” 지젝에게 배제당하는 이로서의 잔여는 상징적 질서 한가운데 자리한 공백의 현시로서 특정한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대적이고 순수한 차이를 상징한다. 따라서 잔여는 하나의 보편성인데, 이 보편성은 특정한 차이들로 구성된 기존의 세계 질서(추상적 보편성)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서에 대립하는 보편성으로서 투쟁하는 구체적 주체라는 것이다. --- 「현대 철학자들의 바울 해석과 주체의 문제 」 중에서
사건의 단독성을 보편성과 연결하려고 시도한 바디우나 지젝과 달리, 프리고진은 사건의 국소성에 더 집중한다. 이 국소성은 사건의 주체와 관찰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건의 관계적 차원을 용인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칭성이 파괴되는 개별적 사건들의 앙상블이 시간의 비가역적 시간성을 형성해간다는 생각은 우리가 주체의 지속을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일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데, 이 결정적일 수도 있을 참고는 사건에 있어 주체의 지속은 개별적 구체성의 층위에서만 제한적인 전망과 함께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촉구다. --- 「주체의 지속 」중에서
유대인도 아니고 헬라인도 아닌 자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고전 1:28)을 찬미하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보다 어느 정도 우위에 있다는 지젝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볼 수도, 사랑의 급진성을 볼 수도 있다. 이 모든 가능성들은 주변부의 ‘주체-되기’가 가능함을 선언하는 바울의 결연함에 대한 몇 가지 부연이다. 우리는 이 부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일 수 있다. 주변부의 ‘주체-되기’ 과정은 칭송받기에는 너무도 고단하다고. 우리는 숱하게 박수칠 때 화려하게 떠나는 것은 박수 받는 이들이 아니라 박수치는 이들이었음을 경험했다. 그렇게 메타구조에 묻혀버린 주변부들의 ‘아무것도 아닌 것임’의 재확인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아픔이다.
--- 「 다시, 바울의 ‘주체-되기’와 촛불항쟁의 주변부: 아무것도 아닌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