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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
냉혹한 슬픔 쓰라린 슬픔 아련한 슬픔 슬픈 밥 자욱한 슬픔 고독한 슬픔 뜨거운 슬픔 흐르는 슬픔 거룩한 슬픔 슬픔의 축제 착륙 작가의 말 |
저김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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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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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이라고 했다. 하늘과 바다에 잇닿아 세 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가기까지 꼬박 스물여섯 해가 걸렸다. 떠나던 날의 흥분과 격정이 여전히 심장 한구석에 돌올한데, 세월은 매정했다. 가차 없었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노년의 삭은 몸이 되었다.
누구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지나버린 젊은 날을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애당초 후회를 모르는 천품이 애달프지 않다. 후회는 미련이다. 지난날 가졌던 것과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어리석은 셈속이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갖고파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주먹구구다. 11월의 하늘이 차갑고 맑았다. 늦은 가을이자 겨울의 입새, 한해살이풀이 말라가는 계절이다. 고향의 아낙들은 김장 채비에 분주하고, 착실한 농군들은 얼갈이하기에 바쁠 테다. 세상의 형편이 암만 수상해도 시절은 놓칠 수 없다. 속일 수도 없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다. ---「이륙」 중에서 외로움이 내 등을 밀어 더 큰 세상으로 가라 했다. 넓은 세상에서 사람들과 얼키설키 어울려 외로움 따윈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법칙과 사람의 약속은 언제나 야릇했다. 그곳은 또 다른 짐승들의 세계였다. 알 수 없는 덫과 함정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 해주 놈 때려주자! 조금 전까지 어우렁더우렁 몰려 놀던 아이들이 편짝을 이루어 난장을 치기 시작했다. ― 이유가 뭐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유가 있다면 사과하고 양보할 마음이었다. 나는 심심하여 친구가 아쉬우니 못마땅해도 한 발짝 물러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아무리 거듭해 물어도 요망한 작당을 벌인 패거리의 생억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유가 없다! 나는 아무 까닭도 없이 매질당하고 있다! ---「냉혹한 슬픔」 중에서 병세가 위중하여 사경을 넘나들면서도 아버지는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인천 감옥에 갇혔다 탈옥한 나는 여전히 사방팔방으로 돌아치고 있었다. 술기운에 젖어 삼남을 유람하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해 동냥중이 되었다. 세간과 출세간, 울분과 순종, 성과 속의 난마를 헤매는 사이, 아버지는 나를 대신해 징역살이를 했다.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 이승의 지옥인 감옥에서 일 년간 차꼬를 차고 갇혀 있는 동안 아버지는 생병이 들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아들을 기다리며 흉한 꿈이라도 꿀라치면 온종일 밥 한술 뜨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의 지병은 깊어져갔다. ― 얘는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 있느냐? 그럼에도 아버지는 단 한 번 나를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를 막거나 꺾지 않았다. 안 된다, 못 한다 하지 않았다. 그저 먼 길을 왔으면 어서 들어와 쉬지 왜 뜰에서 손님같이 서성이냐고 채근했다. ---「쓰라린 슬픔」 중에서 ― 낭자의 마지막 길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것이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생전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손이었다. 책장을 넘기거나 붓 잡는 법을 가르칠 때에도 행여 닿을까 스칠까 몸가짐을 조심했다. 그렇게 아껴두었던 손을, 발을, 얼굴을 가만가만 씻는다. 수줍게 봉긋 솟은 젖가슴과 하얀 속살을 산쑥을 삶은 검푸른 물로 차근차근 닦는다. 쓰디쓰고, 쓰라리다. 언젠가 내 가슴으로 품어 안으리라 했던 그 따뜻한 몸을 차갑게 식은 후에야 어루만진다. 정갈한 손발톱은 깎을 것이 없다. 손끝이 여물어 바느질이며 길쌈이며 흠잡을 게 없었다. 처음 만난 날 먹었던 밥의 양을 기억하고 모자랄세라 공기가 비기 전에 덧밥을 얹어내던 눈썰미도 엽렵했다. 버선 속의 발가락이 맥없이 굼실거린다. 여옥이 만들어준 가름솔이 얌전한 버선은 오래 걸어도 발이 편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험한데, 같이 가자던 사람은 더 이상 곁에 없다. ---「아련한 슬픔」 중에서 두 번째는 기막히게도 어머니가 동반 자살을 채근하였다. 쓰치다를 죽이고 해주 감옥에서 인천 감옥으로 배를 타고 이송될 때 어머니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 얘야, 이제 인천으로 실려 가면 너는 왜놈의 손에 죽게 된다. 왜놈의 손에 죽을 바에야 차라리 나랑 같이 맑은 물에 깨끗이 빠져 죽자. 자식 앞세운 어미가 세상의 무슨 영화를 보겠느냐? 물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지라도 모자가 함께하는 편이 나으리라! 달빛도 없는 여름밤이었다. 천지를 메운 깜깜절벽 속에 일렁이는 물결조차 보이지 않았다. ― 어머니, 저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제가 왜놈을 죽인 것은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입니다. 그것을 굽어 살핀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듭 뱃전으로 내 손을 이끌며 재촉하였다. ― 너희 아버지와도 벌써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을 우리의 제삿날로 삼으리라고. 체구가 작고 호리호리하지만 어머니의 꺽짓손은 장정이 된 내게도 만만찮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얼김에 홧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나는 더욱 힘주어 말했다. ― 어머니, 염려 마셔요. 저는 분명히 죽지 않습니다! ---「슬픈 밥」 중에서 |
1945년 11월 23일, 중국 상해 강만 비행장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모였다.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떠들썩한 오후 1시, 열다섯 명의 사람이 태극의 깃발이 나부끼는 속에서 미군 수송기에 오른다. 한국은 외부의 힘으로 ‘해방’되었지만 자체적인 투쟁으로 ‘광복’하지 못했기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의 공식 정부가 될 수 없었다. 울분을 삼키며 미군의 군정을 받아야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고 올라탄 비행기 안,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가 하염없이 기창 밖을 내다보며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호랑이 꿈을 꾸고 사나운 짐승을 가슴에 품은 소년 김창암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바른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며 김창수로 이름을 바꾸고 스무 살을 맞는다. 용강에서 안악으로 향하는 길, 나룻배가 얼음덩이에 갇혀 나오지 못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을 달래며 직접 얼음산으로 뛰어들어 헤치고 도달한 치하포 나루터에서 김창수는 장연의 조선인인 척 가장하고 있는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맞닥뜨리는데……. |
등장인물
김구 독하고 강단 있는 아이 김창암으로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된다. 궐련을 좋아하고 배움을 즐기며 과묵하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단단하고 의연해진다. 자신의 유일한 무기는 진실과 사람이라고 믿으며 바른길을 고집한다. 김순영 김구의 아버지. 평민이자 농사꾼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본성의 소유자. 술에 취해 주먹싸움을 일삼으나 자기보다 약한 사람, 어린아이와 여자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아들의 학문과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곽낙원 김구의 어머니. 체구가 작고 못생긴 까막눈이지만 올곧으며, 일본군의 공습으로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졌는데도 잠을 편안히 잘 정도로 담력이 세다. 며느리를 일찍 여의고 홀로 손자들을 거두어 기르며 아들의 뒷바라지를 병행한다. 최준례 김구의 아내. 결혼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여성임에도 김구와 결혼 후 자식과 시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교육의 기회를 포기한다. 둘째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 중 직접 세숫물을 버리러 가다가 실족했고 그 후유증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이봉창 한인 애국단의 1호 요원. 역무원, 막노동꾼, 비누 도매상 등을 전전하다 우연히 임시 정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간다. 생각과 행동이 자유롭고 매사에 거침이 없으며 의협심이 강하다. 윤봉길 홍구 공원 의거를 성공시킨 한인 애국단의 청년 의사. 열한 살에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을 하며 농촌 개혁 운동에 힘쓰다 한계를 느끼고 김구를 찾아간다. 사려 깊으면서도 고집이 세고 추진력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