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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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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9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30g | 128*188*20mm
ISBN13 9788975276248
ISBN10 8975276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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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누구에게든 들들 볶아대는 교도소장에게는, 사람들 얘기에 따르면, 수감자들 중 오랜 친구가 하나 있었다. 하루는, 그러니까 ‘산책’이 있던 날, 교도소장이 에르발을 따로 불러 산책자들과의 동행을 부탁했다. 차마 오랜 친구를 자기 손으로 처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에르발은 그의 말을 들으며 손목시계가 떨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에르발, 고민할 것까진 없잖아.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거드름이 잔뜩 묻어 있는 음색이었다. 그날 에르발은 산책자들과 함께 감방으로 갔다. 화가 양반, 석방입니다. 자정을 알리는 베렌겔라 종소리가 들린 뒤였다. 이 한밤중에 석방이라니? 화가가 못 믿겠다는 눈치로 반문했다. 이봐요, 날 힘들게 만들지 말고 어서 나와요. 어둠에 잠긴 복도 한편에는 프랑코주의자들이 하얀 이를 드러낸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 p.27

그의 시골집에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의 눈에 보석처럼 빛나는 게 있다면 딱 두 가지, 하나는 푸른 눈동자에 금발인, 그러나 감기를 달고 살아 콧물을 훌쩍이는 어린 여동생 베아트리스였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사용하던 낡은 마르멜로 양철상자였다.(……)
에르발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첫니가 아니라, 가장자리가 녹이 슨 예쁜 양철상자였다. 아니, 상자 뚜껑에 도색된 아가씨, 머리에 핀을 꽂고 하얀 꽃무늬 소매 섶이 달린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아가씨였다. 마리사 마요를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장터를 구경하려고 양철상자를 빠져 나온 아가씨를 상상했다. --- pp.62-63

에르발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총성을 들었을 때 이미 맥이 풀려버렸다. 아까부터 그는 쭉 뻗은 길 어귀에서 목수의 연필로 포르티코 델라 글로리아를 그리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손놀림이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언어로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었다. ‘열정’의 악기들을 연주하는 문지기 천사들과 그들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나? 그건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 것은. ‘하느님 아들’의 부당한 죽음을 보고 느낀 우울함을 나타낸 게지. 에르발이 예언자 다니엘을 그리고 있는데, 돌 끝에서 다니엘의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다니엘의 시선을 좇던 그는 이내 그 미소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랬다. 햇볕이 내리쬐는 오브라도이로 광장 쪽으로 마리사 마요가 걸어오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덮은 광주리를 손에 들고. --- p.67

마리사 마요가 인사를 건네며 들어섰다. 에르발은 헛기침 소리를 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검열을 할 테니 광주리를 거기 놔두라는 의미였다. 하얀 천을 걷어냈다. 광주리에는 양배추로 감싼 치즈가 들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내용물을 놓치지 않았다. 권총 손잡이군. 다음 날, 마리사가 다시 광주리를 들고 왔다. 에르발은 카스텔라 속에 든 약실을 보고서도 모른 척하면서 표정으로 말했다. 음식을 전해 주겠소.(……)
에르발은 마리사 마요의 눈을 애써 피했다. 똑바로 쳐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날도 고개를 웅크린 채 그녀의 손목을 훔쳐보았다. 괴로웠다.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그녀의 친지들이, 프론테이라의 유지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다 바르카와의 교제를 끊으라고 강요하자 마리사는 손목을 자해했다. 뼈와 가죽만 남았더군. 손목에다 의료용 붕대를 팔찌처럼 감고 다닌대. 다 바르카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모양이야. 이미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거지. 에르발은 간수실로 가서 그녀가 가져온 실탄을 구경이 다른 실탄으로 바꾸었다. 그날 밤, 권총을 조립하고 실탄을 장전하던 다 바르카 의사는 탈주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달았다. --- pp.68-69

정문을 지키는 간수들이 산책자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산책자들은 딱 한 사람, 에르발을 전율에 떨게 한 사람을 제외하면 전혀 못 보던 자들이었다. 에르발을 경악하게 한 그자는 공식 행사에서 성배를 들어 올리던 성직자 출신으로 청색 셔츠(프랑코 정권의 기반 정당인 팔랑헤당을 상징하는 제복.─옮긴이) 차림에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들은 복도를 돌아다니며 목록에 적힌 수감자들을 골라냈다. 다 됐나? 한 명이 빠졌는데, 다니엘 다 바르카라는 자입니다. 순간 음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랜턴 불빛이 누군가를 비추었다. 돔보단이었다. 에르발은 그자가 바로 그들이 찾는 다 바르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깜깜한 어둠 속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를 찾고 있습니까?
다니엘 다 바르카!
나요. 당신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요.
--- pp.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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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스파냐 내전을 역사책이 아닌,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을 통해 더 많이 배웠다
귄터 그라스
『목수의 연필』은 소설 이상의 소설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을 지칭하려면 새로운 소설장르 명을 지어야 할 것이다
트라세그니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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