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저마다 삶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가 있다. 뿌리는 바로 생명줄이다. 거기서 물과 영양분을 찾아 빨아들인다. 뿌리가 굳건하면 제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끄떡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수치심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이 돌밭에 내린 뿌리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탓에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영양분은커녕 안정감조차 주지 못한다.
회복은 옮겨 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메마르고 돌이 많은 수치심의 토양에서 우리를 뽑아내 사랑의 토양에 옮겨 심으신다. 사랑의 옥토에 자리를 잡으면 약한 뿌리가 점점 양분을 얻어 마침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다. 진정한 영양 공급과 진정한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다. ---p.22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1-2).
시편기자가 살던 당시 문화에서 “젖 뗀 아이”란 걷고 말할 수 있는 아이를 말한다. 여러 달 동안 밤낮 어머니의 모유를 먹고 자라 온 아이다. 배고픔의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겨 따뜻한 젖으로 배를 채우며 즐거워했다. 생명을 유지해 주는 젖이 아이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동안 고귀한 사랑의 메시지들이 아이의 영 속으로 함께 흘러들어갔다.
사랑과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아이는 더할 수 없는 안정을 누린다. 젖 뗀 아이는 음식을 먹어 양분을 공급받는다.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떤 음식을 먹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들의 욕구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고, 엄마가 자신들을 끊임없이 보살피며, 때가 되면 밥을 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젖을 뗀 후에도 변함없는 안정을 누리는 것이다.
회복은 우리가 젖을 뗄 수 있을 때까지 사랑받고 양분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젖을 뗀다고 해서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랑과 공급을 경험하면서, 점차 다음에 먹을 음식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장한다. 치유된다. 마침내 새로운 종류의 안정감이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
이는 자기 의존성에서 오는 안정감이 아니라, 양육에서 오는 안정감이다. 우리는 덜 불안하고 덜 예민해진다. 우리의 영혼은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p.26
하나님, 제가 잊고 있는 것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인간임을,
저에게 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에게 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저의 힘과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저의 한계들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저도 제가 인간임을 긍휼히 여기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103
때로 회복은 고단한 일이다. 가끔은 내 존재의 중심까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 어느 곳을 만져도 아프다. 그래서 치유는 반드시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표면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해야만 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치유가 어디서 일어나야 하는지 알고 계신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려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거하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겉모습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성과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남에게 좋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보다 더 깊고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그리스도가 사랑과 복으로 거하시는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일어날 것이다.
너무 어려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다.
--pp.122-123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우리도 때로는 기쁨을 거절할 것이다. 실망할 것이 두려워 기쁨을 거부할 수 있다. 아니면 진지한 믿음의 사람과 기쁨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거부할 수도 있다. 어릴 때 너무 열광한다고 창피를 당한 기억이 있어 기쁨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물론 온전히 기쁨으로만 삶을 가득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기쁨을 누리려면 서로 상충하는 감정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분노와 슬픔, 자책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쁨을 경험하려고 하면 영영 기쁨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은 더 고통스러운 다른 감정들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시면서도 기쁨을 경험하셨다. 고통 속에서도 기쁨이 오거든 받아들이자.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선물이다. --pp.144-145
하나님 제가 슬피 울 때,
위로받기를 거절할 때,
이 고통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저를 붙잡아 주세요.
깊이 슬퍼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동안
침묵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세요.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릴 때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세요.
슬픔으로 인해 주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181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축소하거나 무시하도록 도와주는 황홀한 행복감이 아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현실을 부인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다. 이 평강은 마취제처럼 그저 잠시 기분을 전환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드럽게 보호해 준다.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우리는 잊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안정감이다. ---p.194
치유와 성장을 위해서는 사랑의 관계를 경험해야 한다.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진실을 볼 수 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변화에 필요한 든든한 버팀목을 발견한다.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전까지는 관계들 속에서 상처를 받아 왔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관계를 피하려 했다.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가 영혼 속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고, 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중독과 여러 종류의 강박적 충동들을 일삼는다.
이 성경 본문은 두 가지 종교적인 중독 현상, 즉 ‘강박적인 이타주의’와 ‘종교적인 동기로 인한 자학’에 초점을 맞추고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요약해 보여 준다.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어떤 중독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정한 종교적인 중독뿐 아니라 약물 중독, 일중독, 성 중독, 관계 중독,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자학적 충동들 모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음’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들이는 모든 시간과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상처로 구멍난 가슴은 여전하다.
사랑의 관계가 매우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회복으로 가는 길이다. 친밀한 관계를 위해 마음을 열려고 하면 예전에 사랑을 갈구했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혼자 떨어져서는 회복할 길이 없다.
회복에 필요한 모든 노력은 반드시 유익을 가져온다. 회복은 우리 안에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준다. 그것이 진정한 유익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사랑의 교제를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당신에게 주시기 바란다. --p.271-272
정직을 향한 첫걸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우리는 잘 것인지 아니면 깨어 정신을 차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그냥 자고 싶은 날이 있다. 회복은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지만, 그보다 차라리 부정하고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이 덜 힘들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오늘 하루는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까? 잠깐 동안만 그냥 자면 안 될까?’
가끔씩 사람들은 그냥 다 잊고 자 버리라고들 충고한다. “왜 그렇게 신경을 쓰니? 이미 오래전 일이야!” “아직까지 그 일에 ‘매달려’ 있는 거야? 그냥 용서하고 잊어버려.”
빨리 털어 버리고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쉼과 평온을 허락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쉼과 평온은 ‘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음’에서 오는 것이다. 잠은 부정, 회피, 무념, 가식, 죽음이다. 깨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보고 듣는 것, 우리의 감각과 마음과 생각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내면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깨어서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한다.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주의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pp.279-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