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속의 학자들인 니어링이나 들뢰즈나 아탈리의 충고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적 지혜를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정착민으로 공간을 확장하는 데 자기 생을 바칠 것이 아니라, 어떤 공간이든지 그곳을 재창조하여 함께 더불어 살며 사랑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노마드는 그리스도인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의 역사는 흩어짐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이미 땅끝까지 흩어지는 나그네(증인)의 사명을 생각하셨다. 하나님의 흩으심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성경이 훨씬 쉽게 읽히고, 우리 인생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 p.24
아브라함은 나그네 앞에 엎드렸고 그의 발을 씻겨주며 정성껏 대접하였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인지 모를 정도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모든 나그네(사람) 모습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 p.30
나그네로서 가장 험악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요셉이다. 고대에 나그네로 전락하는 경우는 보통 전쟁 포로가 되거나, 가난이나 다른 연유로 노예가 된다. 요셉은 자기 형제들의 손에 의해 인신매매당한 노예였다. 그는 삶을 송두리째 뽑혀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와 풍습에 던져졌다.
--- p.34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노예로 살던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셨다. 우리는 구원, 자유, 해방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한 이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면서 언약 백성, 언약 공동체를 만드셨다. 그것은 인간 제국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였다.
--- p.42
유발 하라리 같은 학자는 이제 국경은 의미 없어지고, 세계는 자본주의 정신 아래 하나 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슬람 국가이든, 북한 정권이든 어디든 돈의 논리 앞에 굴복한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향하여 이주하고 있다.
--- p.51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이 나그네임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의도적으로 다말과 라합과 롯을 삽입하였다. 그것은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 p.57
베드로는 편지에서 밝혔듯이 나그네 된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편지를 썼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요, 정착민과 달리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과 억압을 받던 약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선언하였다.
--- p.70
베드로는 본도(Pontus)를 시작하여 갈라디아(Galatia), 갑바도기아(Cappadocia)로 내려가서 서쪽 해안지역인 아시아로 갔다가 서북쪽 비두니아(Bithynia)를 언급함으로써 터키를 한 바퀴 도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 다섯 개 지역은 각기 언어와 문화와 풍토가 다르다. 놀라운 사실은 불과 100년이 안 된 시점에 기독교가 이렇게 널리 퍼졌다.
--- p.75
베드로는 이방 선교의 신학적이며 이론적 근거를 확실하게 천명하였다. 흔히 이방 선교는 바울이 문을 연 것처럼 오해하지만, 사실은 베드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사마리아 선교의 문과 이방 선교의 문을 여셨다. --- p.97
초대교회는 혁명보다 개혁을 선택하였다. 바울과 베드로는 여성해방이나 노예 해방을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현대적 인권 개념을 말했더라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단번에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언제나 개혁 정신을 가지고 시대를 이끌어야 한다.
--- p.103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로 진실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진리는 진실하게 전달할 때 힘이 있는 법이다. 결코 거짓이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 베드로후서는 거짓을 경계하고 진실함으로 진리를 전달하는 편지이다. 그런 편지를 거짓으로 몰고 가려는 현대 성경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 p.109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은 기독교 제국을 꿈꾸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머리 숙여 세례받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들은 한 명이라도 좋으니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원하였다.
--- p.117
아담을 저주한 창세기 말씀을 근거로, 중세 교회는 노동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중세 사회에서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노동의 고귀함을 설교하였다. 츠빙글리는 속죄의 노동이 아닌 기쁨의 노동을 가르쳤다.
--- p.127
여성 인권은 불과 100년 전에나 거론되기 시작했고, 여성해방운동은 최근에 와서야 일어난 운동이다. 2,000년 전 베드로나 바울이 여성해방적 시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그 시대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다.
--- p.141
지금까지는 삶의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살았지만,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였지만, 이제 저들은 하나님께 소명받은 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세상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고난은 십자가이며 영광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 p.163
베드로는 약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첫걸음으로 “하나님을 알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고히 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새번역)
--- p.181
자랑할 것 하나 없는 나그네, 점점이 흩어져 어렵게 살아가는 나그네들에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것을 반복하여 새기므로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
--- p.189
창세기가 쓰일 당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남자와 여자)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기억해야 한다. 당시 신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국의 통치자뿐이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 바빌론 같은 대 제국의 왕들뿐이었다. 그런데 창세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한다.
--- p.209
베드로후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 이단을 규정하는 본문이 나온다. 잘 살펴보면 이단은 딱 한 가지였다. 주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구약시대 나타났던 거짓선지자들과 같은 자들이다. 베드로는 구약시대 거짓선지자나 초대교회 거짓 선생은 한결같이 주를 부인하는 자였다.
--- p.215
베드로는 롯을 의롭다고 평가하였다. 그가 의롭다고 평가받은 이유는 그가 소돔과 고모라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마음이 상하였기 때문이다.
--- p.225
베드로 사도가 이름없고 힘없는 나그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인사는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이지 않다. 그의 인사는 마지막 날까지 생명력 있게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다. “여러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입고 또 그분을 앎으로써 계속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이제와 또 영원토록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벧후 3:18, 공동 번역)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