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피를 토하다가 호흡곤란으로 의식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창원씨는 침착하게 간호사를 불러왔고 응급처치가 이뤄졌다. 한 시간의 사투 끝에야 간신히 피가 멈췄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지친 영란씨가 눈을 붙였다. 그제야 비로소 창원씨가 큰 두 눈에서 눈물을 떨궜다. 그리고 다음날 잠시 창원씨가 병실을 비운 사이, 영란씨가 마음속에 감춰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디가 끝인지 모르겠어요. 어제 마음 같아서는 이제 정말 좀 그만하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는데. 자꾸 마음이 약해져요. 끝내고 싶은데…… 포기할 수도 없고……”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 그녀에게는 이루고 싶은 꿈도 있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아픈 사람이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결혼식을 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라도 더 이뤘으면 좋겠다는 응원으로 바뀌었다. 죽음이 예정돼 있다고 해서 지금의 삶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살아 있는 나날이라도 온전히 누리고자 하는 그녀의 바람이 어찌 이기심이고 욕심일까. 그것은 살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응당한 요구이고 살아 있는 자신에 대한 최선의 예의였다. - ‘암병동의 닭살 커플’ 중에서
그에게서 마음의 통증이라도 덜어주려는 거였을까. 암세포는 간까지 전이돼 뇌에도 손상을 입혔다. 언젠가부터 준호씨는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지 못했고 생각하는 단어를 글로 쓰지도 못했다. 통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어떤 날은 한 곳이 가렵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온몸으로 가려움이 번졌다. 준호씨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온몸을 미친 듯이 긁어대며 고통을 호소했다. 가려움이 준호씨를 공격한 그날, 하필이면 막내 규빈이가 병실에서 놀고 있었다. 그간 아이들 앞에서는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기에 아이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처음 봤다. 놀란 표정의 아이. 규빈이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나 고민하는 순간, 아이가 아빠 곁으로 다가갔다.
“제가 긁어드릴게요.”
“고마워, 규빈아.”
“간지러워?”
“응. 가려워. 규빈아, 고마워. 우리 규빈이 최고야, 우리 규빈이 최고야……”
조막만한 손으로 아빠의 몸을 긁어주던 아이. 아마 그것은 어떤 본능이었던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는 원초적인 반응. 평소와 전혀 다른 아빠의 모습이 낯설고 두려웠겠지만 그 공포를 뛰어넘는 사랑이, 아이로 하여금 아빠로부터 물러서기보다 아빠에게 다가가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사랑이 지니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나는 규빈이의 돌발행동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했다. 아이는 아빠의 모습이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섭지만 그래도 다가섰던 것이리라.
사랑, 하니까. -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내 사랑’ 중에서
임신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믿고 싶었을 뿐이다. 열렬히 원했을 뿐이다. 정말로 튼튼이가 선아씨 배 속에 있다고 굳게 믿으면, 아이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갸륵해서라도 아이가 들어와주지 않을까, 바랐던 것이다.
그날부터 선아씨는 소리내어 태교동화도 읽고, 십자수로 아기용품도 만들며 튼튼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밀려오기도 했다. 혹시나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이었다.
“마트라든지 길을 가다보면 아이들이 절 너무나 신기해하고 이상하게 생각했거든요. 다리 없는 아줌마다, 뭐 얼굴은 어른인데 다린 아기야. 이런…… 아이가 나중에 엄마를 창피해하면 어떻게 하나. 아이가 엄마를 피하고…… 그래서 내 위치를, 방송인으로서 입지를 더 다져놓으면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 같고, 조금은 엄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그런 욕심이 조금 있었던 거 같아요.”
걱정과 우려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모든 감정을 앞섰다. 선아씨에게 아이는 희철씨와의 사랑에 대한 징표였고, 자신도 평범한 여자일 수 있다는 증거였다. - ‘엄마가 되고 싶은 엄지공주’ 중에서
힘들 때마다 무덤을 찾는다던 아이는 무덤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있기만 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아빠 등에 기댄 아이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엎드려 있었다. 차갑고 축축한 땅에서 기어이 온기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 아이가 향한 곳은 바로 옆의 작은 무덤이었다. 말라리아로 죽은 막냇동생의 무덤이라고 했다.
“동생을 병원에 보내기 위해 돈을 모았어요. 간신히 병원비를 마련했는데, 너무 늦었어요…… 제 동생은 병원에 가자마자 아무 기척도 없이 죽어버렸어요.”
자신이 너무 어리고 힘이 없어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며 소년은 촬영 내내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 소원은 제 여동생들을 제가 잘 돌봐서, 동생들이 더이상 죽지 않는 거예요. 저는 동생들이 잘 살아가길 바라고 공부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마야미코에게 소원은 책임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뤄지기 바라는’ 무엇이 아니라 ‘이뤄내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기대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아이에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버거운 삶을 버텨내야 하는 아이에게, 소원이라는 단어는 덧없는 꿈같이 느껴졌다. 뭔가를 꿈꾸고 희망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아이 앞에서 소원이라는 단어는 한없이 잔인할 뿐이었다. 소년은 소원이라는 이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매일 당나귀를 돌봤다. 가장 신선한 잎을 골라 당나귀의 먹이를 주면서, 정작 자신은 점심도 거른 채 땡볕에서 몇 시간 동안 당나귀를 지켰다. 이렇게 일하고 받는 돈은 100화차.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다. 아이가 포기한 배움과 미래의 대가는 그토록 보잘것없었다. - ‘열두 살 소년의 유일한 꿈은, 동생들이 죽지 않는 것’ 중에서
우리는 전쟁터라고 하면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곳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다소의 평화로움도 존재한다. 폭격으로 집이 불타고 부서져도, 상황이 가라앉으면 어느 틈엔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먹고살기 위한 일들을 한다. 작물을 수확하는 사람들도 있고 먹거리를 물물교환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살기 위한 또다른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전쟁터,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그곳은 전쟁터이기 전에 누군가의 생활터전이고 어떤 가족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한없이 유약한 존재인 동시에 놀랍도록 강인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전쟁터에서 배웠다. 쉽게 주저앉고 무너져내리지만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걸어가는 것이 사람이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갈등과 고통의 순간들마다, 마치 처음 겪는 일인 듯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나약한 존재. 하지만 그 아픔과 힘듦과 슬픔을 짊어지고 또다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다.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처에도 아파하지 않아 강한 것이 아니라 맥없이 흔들리고 끝없이 아파하면서도 살아냄을 멈추지 않기에 결국 강한 것이다.
--- ‘피의 현장,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