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론이 필요할까?
“도대체 왜 이론이 필요한가? 우리는 경제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우리가 모두 분노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나머지는 지식인들이나 신경 쓸 문제지.” …
흔히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자들도 이런 생각을 강력하게 부추긴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고 복잡하고 재미없는 학설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
사회주의 사상은 ‘추상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모두 옳은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현실 생활에서 통용되는 상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의 문제점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보통은 저마다 ‘이론’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사회에 관한 물음을 던져 보라. 그러면 이런저런 일반적 개념을 사용해서 대답하려 할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이기적 본성을 타고났어.”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지.” “부자들이 없다면,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돈도 없을 거야.” …
사람들이 자신에게는 이론이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정리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사회를 변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는 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이 모두 사회가 왜 이렇게 엉망인지를 설명한답시고 이런저런 견해를 우리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네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온갖 주장에서 무엇이 틀렸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반격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대 이집트와 로마에서는 노예 반란이 있었고, 중국 제국에서는 농민반란이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는 부자와 빈민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바로 그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소책자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문명의 성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것에, 따라서 두 계급 간의 투쟁에 의존했다. …
이집트 파라오나 로마 황제, 중세의 군주가 아무리 강력했더라도, 그들이 아무리 사치스럽게 생활했더라도, 그들의 궁전이 아무리 웅장했더라도, 가장 비참한 농민이나 노예가 기른 농작물을 자신들의 소유로 확실히 만들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일단 지배계급의 권력이 확립되면, 문명이 더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들의 권력은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 부를 지배계급에게 순순히 넘겨주도록 강요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그들은 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새로운 생산방식이 낡은 방식보다 더 효율적일지라도 새로운 방식을 경계하게 된다. …
새로운 생산력(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의 성장이 기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다. 그래서 투쟁이 벌어졌고, 그 투쟁 결과에 따라 사회 전체의 미래가 결정됐다.
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터무니없는 주장 하나는 사회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회는 바뀌었다. 그것도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나라[영국]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그랬다. 겨우 250년 전의 사람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묘사했다면, 즉 대도시와 대공장이 즐비하고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인간이 우주를 탐험하는 모습을 얘기해 줬다면 아마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심지어 철도 체계조차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미 700~800년 전에 시작된 발전이 결국은 이 사회 체제 전체에 도전하게 됐다. 수공업자와 상인 집단들이 도시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들은 여느 중세 사람들과 달리 특정 영주에게 무보수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여러 영주나 농노에게 자신의 생산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식량을 얻었다. 점차 그들은 귀금속을 그런 교환의 척도로 사용했다. …
처음에 도시들은 이 영주와 저 영주가 서로 싸우[느라 도시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지 못하]게 만들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수공업자들의 기술이 향상됨에 따라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창조했고 영향력도 커졌다. ‘시민’, ‘부르주아’, 즉 ‘중간계급’은 중세 봉건사회 내의 한 계급으로서 시작됐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얻는 방식은 중세 사회를 지배한 봉건영주들과 매우 달랐다.
봉건영주는 자기 토지에서 일하는 농노들이 생산한 농산물로 먹고살았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이용해서 농노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고 그 대가를 지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와 달리 도시의 더 부유한 계급들은 공산품을 팔아서 먹고살았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공산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에게 일당이나 주급 형태의 임금을 지급했다. …
중요한 점은 중간계급 시민과 봉건영주는 부의 원천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사회 조직 방식도 서로 달랐다.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는 없을까?
언뜻 보면 개혁주의는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와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듣는 이야기, 즉 ‘의회가 나라를 다스리고, 의회는 국민의 민주적 의사에 따라 선출된다’는 것과 잘 맞는다. 그러나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
개혁주의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이유가 있다.
첫째, 의회 다수파가 된 사회주의자들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 정책들을 도입하고 있는 동안에도 진정한 경제 권력은 여전히 기존 지배계급의 수중에 남아 있다. 그들은 이 경제 권력을 이용해서 모든 산업부문의 가동을 중단시키고 실업자를 양산하고 투기와 사재기로 물가를 끌어올리고 돈을 해외로 빼돌려서 ‘국제수지’ 위기를 조성하고 이 모든 것을 사회주의 정부 탓으로 돌리는 언론 공세를 펼칠 수 있다. …
자본주의가 개혁될 수 없는 둘째 이유는 기존 국가기구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는 물리력을 행사하는 수단, 즉 폭력 수단을 거의 모두 통제하고 있다. 만약 국가의 여러 기구가 중립적이라면, 그리고 자본주의 정부든 사회주의 정부든 정부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한다면, 국가는 대기업의 경제적 사보타주, 즉 방해 행위를 막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구가 작동하는 방식과 누가 실제로 명령을 내리는지를 살펴보면, 국가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개혁주의가 막다른 길일 수밖에 없는 셋째 이유는, 의회 ‘민주주의’의 구조상 어떤 혁명적 운동도 의회를 통해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국가기구의 핵심 요직을 통제하는 자들에 맞서 싸우는 최상의 방법은 좌파가 먼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회는 항상 대중의 혁명적 의식 수준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틀렸다.
대중은 오직 투쟁을 통해 실제로 사회를 변혁하기 시작할 때에야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공장을 점거하거나 총파업에 참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이 현실성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