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자(또는 땅에 떨어진 씨) 비유(MARK 4:2-20)가 좋은 예다. 씨 뿌리는 자 비유는 독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최소한 비유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이 왜 씨앗을 낭비하고 있느냐와 같은 질문은 제외하고라도 말이다. 어떻게 농부가 길가나 잡초가 자라는 땅이나 돌밭이나 좋은 땅을 가리지 않고 아무데나 씨를 뿌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씨앗을 허비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다. 현대의 기준에 비춰 보면, 예수님이 예를 들기 위해 서툰 농부를 선택하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농부의 행위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은 주로 팔레스타인의 농사법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임을 알게 된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씨를 뿌리는 일이 밭을 가는 일보다 먼저 행해진다.
--- 「제3장 비유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중에서
또한 예수님이 숫자를 사용하시는 장면에는 종종 지나친 과장이 있기도 하다. 용서하지 않은 종 비유에서 예수님은 한 종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았다고 말씀하신다(Matt 18:24). 주전 4년경에 갈릴리와 베뢰아가 로마에 1년 동안 바친 전체 공물 액수가 겨우 200달란트였고, 헤롯 대왕이 1년간 거둔 수입 총액이 900달란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액수가 실제로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랑이 도착했는데도 열 처녀가 다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이라고 인정해야 한다(Matt 25:5).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가 실제 생활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은, 비유가 때로 흔치 않은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현실적인 삶을 반영했다는 말은 비유가 우화와는 다르게, 나무가 말하고, 사람들이 새처럼 날아다니고, 동물들이 책을 쓰는 등 비현실적인 세상을 상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일상적인 장면과 경험들이 사용되었고, 비록 가끔 진기한 모습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비유는 일상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 「제3장 비유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중에서
비유 연구에서 율리허가 중요하게 공헌한 점은 비유와 알레고리의 차이점을 지목한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교회를 괴롭혔던 모든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이 맞지 않음을 보여 주어, 단번에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게 했다는 데 있다. 이제 비유는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알레고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알레고리는 은유들이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지만, 이와 달리 비유는 대부분 하나의 확장된 직유나 비유이므로 단 하나의 비교점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리허의 저서가 비유 해석에 지대하게 공헌했음에도 그 자체에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제5장 최근에는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의 급부상으로 비유 해석법은 또 다른 통찰을 얻게 되었다. 1950년대에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n)과 빌리 마르크센(Willi Marxsen)의 저서가 출간된 이래 복음서 저자들이 각자의 복음서에 편입한 자료들에 부여한 신학적인 강조점과 해석은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복음서 저자들은 가위와 풀을 들고 다양한 전승 자료를 막연하게 오리고 붙이는 편집자들이 아니라 청중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전승 자료를 해석한 신학자라는 사실이 이제 분명해졌다. 그래서 비유를 세 번째 삶의 정황(the third Sitz im Leben), 즉 복음서 저자들의 삶의 정황에 비추어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래 첫 번째 삶의 정황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적대감을 품은 청중에게 주어진 비유가 이제 세 번째 삶의 정황에서 교회에 주어졌다면, 복음서 저자들이 그들의 상황에서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제6장 비유 해석, 이렇게 하라」 중에서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 나라의 대수롭지 않은 시작과 그 나라의 최종적인 영광 사이의 대조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있다. 비유의 주요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모습에서 드러날 그 나라의 거대함에 있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드러날 때의 모습이 거대하리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나라가 거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의 나라는 거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작고 대수롭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예상 밖의 모습으로 임했다.
--- 「제7장 겨자씨 비유(MARK 4:30-32); 누룩 비유(MATT 13:3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