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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남자

그림자 없는 남자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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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9월 1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72쪽 | 664g | 140*210*34mm
ISBN13 9791190305112
ISBN10 119030511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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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는 엘리후 후프스가 영원한 현재 속에 갇힌 거라고 생각한다.
어둑하게 땅거미가 진 숲속을 맴돌며 헤매는 남자, 그림자 없는 남자와 같다.
그는 그처럼 어둑한 땅거미 속에서 구조되어, 비록 영문은 모르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데 몹시 감격하고 있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기억상실증 환자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알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며 관심을 보이는 낯선 이들의 자극 없이 홀로 남겨진다면, 어둑어둑한 땅거미마저 사라지고 그는 완전히 길을 잃을 것이다.
--- p. 28

E. H. 주변에 있으면 현재시제라는 중력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느낀다.
E. H. 주변에 있으면 혹시 그림자를 잃어버린 게 아닌지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그림자를 찾게 된다.
그러나 마고는 몹시 외롭다. E. H.와 함께 있을 때는 외롭지 않다. 페리스의 실험실에 다른 이들이 있을 때는 말없이 뻣뻣하기만 하던 마고 샤프가 기억상실증 환자에게는 이따금 충동적으로 말을 걸고, 듣는 이 없이 단둘만 있을 때면 신뢰하는 가까운 친구에게 하듯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곤 한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무척 놀랄 것이다.
마고는 E. H.를 데리고 연구소 뒤편 공원에 산책 나가는 일을 자원했다. E. H.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1층 식당까지 데리고 내려가는 일도 자원했다. 의료 검사 일정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가 자원해서 그를 데리고 간다.
마고와 함께할 때면 E. H.가 유쾌한 모습을 보이듯이 그녀 역시 그와 함께할 때는 유쾌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나이 많은 친척, 아마도 아버지에게 자랑하듯 E. H.에게 자신이 이룬 학문적 성공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마고가 엘리후 후프스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그를 남자로 여기고 있고 아주 많이 끌리고 있다.) 이곳 동부 펜실베이니아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 때때로 매우 외롭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엘리, 당신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당신이 내 유일한 친구예요.” E. H.가 이 고백에 미소 짓는다. 이 대화가 테스트의 일부이며 자신은 때맞춰 응답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요…… ‘내 유일한 친구’. 당신도 내 유일한 친구예요.”
--- p.59

기억상실증 환자의 과거로부터 불현듯 기억의 섬들이 떠오르고 있다.
기억의 섬.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밀턴 페리스였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마고는 진이 다 빠져버린 것 같다. 이렇게 길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혼을 남에게 드러내어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밀턴 페리스가 연인이긴 하지만, 아니 연인이었던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그와는 어떤 이야기도 마음을 터놓고 해본 적이 없었다. 마고는 눈을 감고 어둠 속에 뭔가 떠 있는 걸 본다. 내륙호에 떠 있는 섬들. 반사된 빛 속에 떠 있는 작은 섬들. 호수 자체가 엄청나게 커서 둘레가 보이지 않는다. 호수에 잔물결이 인다. (보이지는 않지만) 태양 혹은 달에서 빛이 나와 호수에 주름을 만들고 있다. 섬 사이를 잇는 결합조직은 땅, 즉 호수 바
닥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빛이 일렁이는 수면 아래 결합조직이 있는 걸 모른다면 이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E. H.가 마고를 안아 위로해준다. 이제껏 이런 식으로 마고 샤프를 안아준 사람은 없었다.
마고 샤프와 엘리후 후프스가 이토록 친밀하게 몸을 맞대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단둘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과 지금 하는 행동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마고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빨리 뛰는데도 이 남자의 가슴
에 얼굴을 묻는다. 그녀의 얼굴이 닿아 있는 부드러운 캐시미어 울과 불과 몇 센티미터 떨어진 가슴 속에는 기억상실증 환자의 심장이 따뜻하게 뛰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아름다운 영혼.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 아니고.
--- p.128

그녀가 생각한다. 내게 ‘몸’이 없다면 어떨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이들이 이야기할 때, 심지어 그녀의 분야인 신경심리학에 대해서 말하거나 ‘마고 샤프’를 특정해서 이야기할 때도 언제부터인가 집중하기가 힘들고 거슬린다고 종종 느끼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피부 속 두개골 안에 들어 있는 뇌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뇌주사腦走査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뇌의 작용을 거의 관찰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과 말로 활기를 띠는 뇌는 안에서부터 환하게 빛난다. 전기 충격과도 같은 뉴런의 신속한 불수의적 발화가 일어난다.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일까?
그러한 빛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
그녀는 몇 배로 확대한 뇌세포 사진을 찍었다. 가장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과 질감을 지녔다. 언젠가 그녀는 아주 얇게 잘라놓은 엘리후 후프스의 뇌를 자세히 조사하게 될 것이다.
아, 내 사랑. 당신 없이 살아가는 삶을 견딜 수 없어요.
그녀는 견딜 것이다. 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항상 E. H.가 곁에 없을 때에도 그녀는 그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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