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대학원 신학과에서 「틸리히의 종교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던 수업에서 필자가 했던 강의를 기초로 한다. 그런데 필자의 수업운영 방식에 따라 틸리히 저작들의 내용 요약과 비평 등 소개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그러한 저작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더 주목한다. 학원 교실에서 책을 대신 읽어주고 요약하며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연구자 개인의 몫이다. 말하자면 틸리히가 말한 ‘무엇’은 각자 챙길 일이로되, 함께 모여 논하는 자리에서는 그러한 무엇을 ‘어떻게’ 새기고 엮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애써 틸리히는 그렇게 목청을 돋우었고, 또한 ‘왜’ 우리는 나온 지도 한참 지난 그의 글을 오늘날 수고로이 되돌아 읽고 새겨야 하는지에 더욱 관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틸리히의 작품을 훑어가되 내용보다는 형식에, 즉 주장보다는 방법과 근거에 더욱 관심하여 읽어가고자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용에만 매몰되어 새로운 구도를 창조적으로 개진하는 그의 통찰을 놓쳐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들어가면서」 중에서
틸리히의 사상을 살피는데 그 나름의 학문적 계보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를 거슬러 살피는 것은 마땅하다. 틸리히의 사상 계보를 살핀다면 철학사적으로는 플라톤에 있어야 하겠지만 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프란체스코 전통까지 거슬러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근세로 건너와서는 독일관념론을 장식하는 피히테, 쉘링, 헤겔을 들 수 있겠다. 틸리히는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쉘링의 사상 연구에 집중해서 썼다. 철학박사 논문은 쉘링의 자유 개념을, 신학박사 논문은 쉘링의 죄의식 논의를 다루었다. 박사학위 논문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경계선에 선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경계에도 서 있고, 근대와 현대 사이에도 서 있으며, 자유와 죄의식 사이에도 서 있다. 그런데 그는 근대라는 토대 위에서 현대를 이끌고 나간다.
---「철학적 신학과 종교철학: 목적과 동기 」중에서
종교에서 개념화란 무엇인가? 신을 인간의 차원에서나 세계의 차원에서 새기는데 이때 벌어지는 일이다. 본디 ‘힘’이었는데 ‘신’으로 옹립되었다가 ‘참’으로까지 새겨진다. 그런데 그러면서 인간과 세계에 의거하여 되새겨진다. 시적으로 본다면, 자아에 의존하게 된 것은 주로 근세의 일이고, 고대 ? 중세에는 주로 세상에 의존해서였다. 여기서 세상은 가장 우선적으로 자연이다. 말하자면 자연이라는 세상을 근거로 신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신은 초자연이 된다. 이것이 바로 고대 ? 중세 시대에 초자연이라는 지평이 지배하게 되는 이유다. 자연이라는 세상을 터전으로 신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인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신을 말한다. 이때 인간은 주체이고 자아이니, 자아의 확실성을 근거로 신의 확실성을 끌어내려 했다. 종교를 문화로 새기는 것도 이러한 구도의 연장선상에서다. 이제 신을 자연-사회-역사-문화의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구도의 전환인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무한정자의 파괴가 일어난다.
---「종교적 우상화 극복을 위한 역설: 종교란 무엇인가?-2」 중에서
앎이 도달할 수 없는 삶은 모르지만 없지 않으니 신비이고 선험이고 비매개이다. 삶이 그렇고 믿음이 그렇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사는 것처럼 내가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한다. 무제약자의 차원, 즉 신비라고 불리는 영역은 모름이되 삶이고 믿음의 근거이니 앎과의 관계에서 계속하여 다가가면 물러서는 긴장관계를 이룬다. 앞서 말한 역설이 이 대목에 연관될 터이다. 역설은 신비에 대한 인간의 외마디일 따름이다. 삶과 앎 사이의 어찌할 수 없는 거리에 정직함이요, 믿음과 삶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만일 이 둘이 만날 수 있다면 긴장관계는 사라지고 상관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가면 또 밀려나고 더 나가면 더 밀려난다. 계속 주거니 받거니 밀고 당기는 관계가 엮어진다. 이래서 신비적 선험이 상관을 가능케 하고 필요하게 하는 근거라고 했다
---「역설의 꼴로서의 상관과 그 뿌리인 신비적 선험」 중에서
우리 삶의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격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무인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견주어 신에 대해서는 초인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격주의로 말한다. 물리법칙의 작동, 중력은 상관없이 다 똑같이 작동한다. 그게 무인격이다. 그런데 신과의 관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무인격을 느끼지 못한다. 왜? 인격주의의 횡포 때문이다. 무인격이야말로 회의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고 타당하다는 보증이다. 신-인-세계라는 삼각관계에서 인격성만 아니라 무인격성도 있을뿐더러 사실상 무인격이 비교도 안 되게 더 크다. 그런데 인격이라는 것으로 다 포장한다. 아전인수가 바로 인격성의 문제이다. 성서적 종교가 표방하는 인격주의로 다 싸잡을 것이 아니라 무인격으로, 초인격으로 가자는 것이다. 신의 초인격적인 영역, 우리가 알수 없는 신비가 지니는 뜻에 주목할 일이다. 결국 이것이 저것을 필요로 하고 저것도 이것을 필요로 한다는 통찰이다. 공존적 긴장이고 긴장적 공존이다. 성서적 종교와 존재론적 탐구에서 껍질을 벗길수록 이것 안에 저것, 저것 안에 이것이 그렇게도 깊게 깔려 있으니 서로 얽힐 수밖에 없다. 저것을 제쳐놓고 이것만 붙잡을 때, 또는 반대로 이것을 제쳐놓고 저것만 붙잡을 때 일어나는 왜곡과 억압에 한 비판을 틸리히는 이토록 집요하게 전개했던 것이다.
---「궁극으로 수렴하는 종교와 철학: 성서적 종교와 궁극적 실재 탐구」 중에서
유한성과 관련하여, 진정한 인간 자아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담고 있다. 실존의 시간성은 극복될 수 없다.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긴박한 선택상황에서 결단을 위한 요소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용감하게 긍정한다. 그리고 자유와 관련하여, 진정한 자아는 인간의 타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비록 타락이 극복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유를 통해 진정한 자기-긍정의 가능성을 주는 실존적인 기획으로 변모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유한한 자유”는 유한성의 맥락성과 자유의 창조성 사이의 실존적인 통합을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래서 유한한 자유는 유한성과 자유의 역설적 연합에 근거한 인간의 진정한 자기-이해를 위한 궁극적인 개념이 되는 것이다.
---「자기-초월에 근거한 유한성과 자유의 역설적 얽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