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잡동사니들을 죄다 넣어둔 내 책장 서랍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 있다. 코르크 재질 나무판의 각 이음새마다 모란꽃 무늬 색지(色紙)를 붙였는데 아마 원래는 서양의 가루담배를 담는 상자였을 것이다. 딱히 내세울 만큼 아름다운 물건도 아니지만 나무의 색감이 수수하고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운 것하며 뚜껑을 닫을 때 톡 튀는 소리가 나는 것 때문에 지금도 내 마음에 꼭 드는 물건 중의 하나다. 안에는 별보배고둥(개오지 과의 소용돌이 모양 조개. 타이거조개, 별보배골뱅이라고도 한다. 안산(安産)을 비는 부적으로 쓰였다)이며 동백나무 열매, 어릴 때 갖고 놀던 자질구레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중에 한 가지, 진기한 모양의 은수저가 있다는 건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6밀리쯤 되는 오목한 접시 모양의 길둥근 숟가락에 살짝 뒤로 젖혀진 짤막한 자루가 달린 것인데, 제법 도톰하게 만들어서 자루 끝을 손으로 들어보면 약간 묵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때때로 작은 상자 안에서 그 은수저를 꺼내 뿌옇게 서린 먼지를 정성껏 닦고 오래도록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우연히 이 작은 숟가락을 찾아낸 것은 지금부터 따져 보면 참으로 옛날 옛적의 일이었다.
집 안에 오래된 찬장 하나가 있었다. 깨금발을 딛고서야 가까스로 손이 닿을 무렵부터 나는 그 찬장 선반을 열어보고 서랍도 빼보곤 했다. 하나하나 감촉이 다르고 저마다 생소한 삐거덕 소리를 내는 게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모갑(玳瑁甲) 손잡이의 작은 서랍 두 개가 나란히 달렸는데 한쪽 서랍이 몹시 뻑뻑해서 아이 힘으로는 도무지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점점 더 호기심이 나서 어느 하룻날에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마침내 억지로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안에 든 것을 방바닥에 엎어놓고 보니 풍진(風鎭. 족자가 흔들리지 않게 아래쪽에 매다는 수정이나 옥돌. 그 끝에 짧은 매듭술을 달아 운치를 더한다)이니 인롱(印籠. 약품이나 도장, 인주 등을 넣어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작은 용기)의 허리꽂이(에도 시대에 남자가 담배쌈지나 지갑, 인롱의 끈 끝에 매달고 허리띠에 질러 빠지지 않게 한 꽂이. 산호, 뿔, 마노, 상아 등으로 만들었다) 같은 물건과 함께 그 작은 은수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 은수저를 꼭 내 것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곧장 어머니에게 달려가 말했다.
“이거, 나 주세요.”
안방에서 코안경을 쓰고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는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보였지만,
“잘 간수해야 한다.”
하고 여느 때 없이 금세 허락해주시는 바람에 나는 기쁘기도 하고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 서랍은 우리 집이 간다에서 이곳 야마노테로 이사할 때에 살짝 어긋나면서 도무지 열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그 바람에 유서 깊은 이 은수저도 어느새 어머니에게조차 까맣게 잊혀버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그 유서를 이야기해주었다. --- pp.11-13
드디어 학교에 갈 날이 되었지만 나는 아침부터,
“오쿠니가 안 가면 나도 안 갈 거야.”
라는 말만 되풀이한 끝에 그럭저럭 하루가 저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은신처인 침실에서 반 강제로 거실의 문초장(問招場)에 끌려나왔다. 식구들이 모두 나서서 어르고 달래가며 학교 가기를 권했지만 나는 결심을 하고 용을 썼다. 그랬더니 갑작스럽게 형이 내 멱살을 잡고 괴성을 올리며 방바닥에 내동댕이친 끝에 연달아 뺨을 쳤다.
“몸도 약한 아이를 왜 이러니, 왜 이래.”
이모님이 깜짝 놀라서 뜯어말렸다.
“내가 찬찬히 알아듣게 타이를 테니까 이러지 마라.”
겨우 나를 감싸 안고 침실로 데리고 도망쳤다. 형은 고등학교에서 유도를 배운 사람이다. 그다음 날은 볼이 퉁퉁 부어 밥도 먹지 않고 침실에 꿍하니 틀어박혀 있었더니 이모님이 걱정이 되어 부처님 공양 밥을 몰래 내게 먹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갑자기 열이 올라서 그러잖아도 신경이 예민한 내가 밤새 잠들지 못하자 이모님은 염불을 웅얼거리며 한숨도 자지 않고 간병을 해주었다. 사오일을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에는 학교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윽고 두통이 가시고 열도 떨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그날 저녁부터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한결같이 오쿠니가 안 가면 나도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왜 그런지 이번에는 다들 별로 혼도 내지 않고 내게 묻는 것이었다.
“오쿠니가 가면 너도 틀림없이 갈 거지?”
“그래, 갈 거야.”
나도 딱 잘라 말해버렸다.
다음 날 이모님은 얼굴이 핼쑥해진 나를 업고 학교가 파할 때쯤에 교문 앞까지 데리고 갔다. 학교까지는 150여 미터밖에 안 되었다. 딩동댕동 하는 벨소리가 울리자 잠시 뒤에 학생들이 우르르 교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쿠니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책 보퉁이를 안고 기운차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모님이, 아유, 장하구나, 장해, 하고 칭찬을 하자 오쿠니는 의기양양하게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모님 등에 업혀 있으면서, 오쿠니가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가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pp.107-109
“울보래요, 울보래요.”
하고 발로 박자를 맞추며 떠들면서 어딘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누나는 다시 만들어줄 테니까 괜찮다면서, 당장 집에 돌아갈 거라고 잔뜩 토라져버린 나를 달래고 눈물을 닦아주고 코를 풀어주고 하는 사이에 수업 종이 울렸다. 누나는 다음 쉬는 시간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가버렸다. 교실 밖에서 살그머니 상황을 엿보고 있던 악당들이 누나가 사라지자마자 우르르 들어왔다.
“울다가 웃다가 바보래요, 바보래요.”
그렇게 놀리면서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갑반의 담임선생님은 수염을 기른 미조구치 선생이라는 사람이었다. 후루사와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싶을 만큼 착한 분으로, 특히 얌전한 나를 주목하며 잘 대해주셨다.
한 책상에 나란히 앉은 아이는 이와하시라는 기와 장사하는 집 아들이었다.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데 달인이었다. 녀석은 책상 한가운데 연필로 줄을 긋고 내 팔이 조금이라도 제 영역으로 넘어가면 당장 팔꿈치로 쿡 찌르거나 코딱지를 붙이곤 했다. 그런 녀석이 수업 시간에 옆에서 자꾸 말을 붙이는지라 영 싫기는 했지만 얼렁뚱땅 대꾸를 했더니 선생님이 알아보고 칠판에 두 사람의 성씨를 나란히 써놓고 그 위에 큼직하게 검은 동그라미를 붙였다. 이와하시는 그것을 보자마자 석판(나무틀로 감싼 얇은 점판암에 납석(蠟石) 등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 필기구. 닦아내면 말끔히 지워지기 때문에 학생들의 필기 연습용으로 쓰였다) 위에 엎드려 울었지만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누나가 오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수업시간에 잡담을 했구나?”
누가 그새 일러바친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나는 잡담 같은 건 안 했다고 말했다. 누나는,
“그렇게 숨겨봤자 소용없어. 칠판에 검은 동그라미가 붙어 있잖아.”
그제야 검은 동그라미는 나쁜 짓을 했을 때 붙인다는 것을 알고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 pp.116-118
그 학기도 끝나갈 무렵 이웃집에 새 사람이 이사를 왔다. 그 집과는 뒤꼍의 밭을 사이에 두고 삼나무 담장 하나 뿐이어서 서로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었다. 내가 뒤꼍으로 돌아가 가만가만 상황을 살펴보니 담장 밑에 마침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가 나와서 건너편에 슬쩍 숨어 삼나무 틈새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잠시 뒤에 그 여자애가 다시 나와 나를 흘끔 쳐다보는지라 나도 흘끔 보았고, 그러고는 둘 다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짓을 몇 번 되풀이하는 사이에 나는 그 여자애가 홀쭉하니 키가 커서 어딘가 아픈 아이 같은 것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에 서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쪽에서 슬그머니 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따라 슬그머니 웃었다. 여자애가 고개를 돌리며 빙그르르 한쪽 다리로 돌았다. 나도 빙그르르 돌았다. 여자애가 깡충 뛰었다. 나도 깡충 뛰었다. 또 깡충 뛰면 깡충 뛰었다. 그렇게 깡충깡충 뛰는 사이에 어느새 나는 편도나무 그늘을, 그 여자애는 담장 옆을 벗어나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그때,
“아가씨, 밥 다 됐어요.”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는 낭랑한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하더니 냉큼 뛰어가버렸다. 나도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다시 나가봤더니 여자애는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같이 놀자.”
라면서 친하게 다가왔다. 좀 더 낯이 익을 때까지 아직 대여섯 번은 더 깡충깡충 뛸 마음을 먹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일이 쉽게 풀려서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그 곁으로 다가갔다. 여자애 쪽에서는 더 이상 수줍어하는 기색 없이 시원시원한 말투로 물었다.
“넌 몇 살이야?”
“아홉 살.”
“나도 아홉 살.”
여자애는 슬쩍 웃으며 어른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그치만 정월 생이라서 한 살 더 많아.”
나도 물어보았다.
“넌 이름이 뭐야?”
“케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정해진 방식대로 서로 이름을 밝히고 첫 대면의 인사치레가 끝났다.
“나도 이제 곧 학교에 가니까 우린 같은 학교에 다닐 거야.”
케이의 그 말에 나는 반가워서 우리 학교의 좋은 점, 수신 수업에서 해주는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것, 담임선생님이 착하다는 것 등을 알려주며 작은 지혜를 쥐어짜 케이를 같은 학교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케이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근성이 강하고 붙임성이 있는데다 또릿또릿한 눈과 까만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창백하고 부드러운 뺨에는 아름다운 핏기가 투명하게 비쳐보였다. 그런 강한 성품과 조숙한 얼굴로, 숫기라고는 없이 어리바리한 한 살 어린 나에게 마치 여왕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지만, 나는 흡족하게 이 여왕의 의지에 나를 맡기기로 마음먹었다.
--- pp.139-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