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현상 유지되는 기존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적, 정치적 활동은 무엇이든 간에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중에서 으뜸은 진화 개념이었다. 당시 ‘변형 개념’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자신이 위험천만한 정치적 급진주의자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악명이 높았던 사람은, 다윈이 이미 저서를 읽은 바 있는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이었다. 1798년에서 1809년 사이에, 라마르크와 이래즈머스 다윈은 동식물이 창조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으며, 무기물에서 자연 발생했다는 주장을 각기 독자적으로 펼쳤다. 그들은 생물이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다양해졌다고 보았다. 두 사람은 동물이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식물도) 몸의 각 부위를 쓰거나 쓰지 않음으로써 환경에 적응하고, 그 적응 양상이 자손에게도 전해진다고 믿었다. 이는 ‘획득형질의 유전’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 체계에 인간도 포함시켰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이 ‘개선’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사회구조까지도 변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p.59
다윈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단호하게,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자연에 관해 믿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에덴동산을 완전히 빼버린 ‘기원에 관한 그림’을 제시하고, 줄기차게 생물들을 만들어내는 천상의 시계공이라는 이미지를 땅 밑에 묻어버렸다. 그는 독실한 존 허셜 경이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라고 부른 것을 내치고, 페일리의 완벽한 적응이라는 개념을 불완전함과 우연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동식물을 각별한 설계나 각별한 창조의 산물로 보지 말아야 했다. 그는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나는 종이 불변이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더군다나 다윈의 기본 주제는 점진주의였다. 라이엘이 주장했듯이, 모든 일은 조금씩 서서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만물은 똑같은 하나의 설명으로 엮였다. 시간, 우연, 번식이 지구를 지배했다. 생존경쟁도 그렇다. 생물세계를 설명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견해가 없을까 하고 찾던 사람들은 다윈의 말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 후 어느 누구도 전과 같은 관점에서 생물과 자연세계를 볼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다윈의 생물학이 경쟁적이고 진취적이며 산업화한 영국의 기풍을 반영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자연법칙에 호소한 것이 전반적으로 세속화 경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세계를 자신의 용어로 이해하겠다는 당대 과학계의 주장을 옹호했다는 것도 말이다. ---p.100
다윈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조차도 대부분 그가 든 사례들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언어학자 막스 뮐러도 1861~1862년 런던의 겨울 계절 학기에 언어의 기원을 다룬 강의를 할 때 다윈의 이론을 언급했다. 뮐러는 상류층인 청중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라고 했다. 우리의 언어 능력이 동물의 소리에서 발달했을까? 뮐러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단어는 생각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각은 인간만의 특성이라는 것이었다. 뮐러는 동물이 인간의 개념 같은 것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진화론을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자연선택 개념에는 찬사를 보냈고, 그것을 인도?유럽어족의 계통과 역사적 관계에 적극적으로 응용했다. 당대의 위대한 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도 마찬가지였다. ---p.143
이 무렵 세계 전역에서 자연을 대하는 학자들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모더니즘이 발흥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이 야생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 또는 진화 계통의 역사는 어떠한가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유전, 교잡, 돌연변이, 변이의 기구를 추적하면서 살아 있는 몸으로 관심을 돌린 생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윈이 세상을 뜰 무렵에는 이미 많은 이가 유전이 생명의 열쇠라고 믿고 있었다.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무렵에 그들은 죽은 동식물의 목록 작성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몸의 내부 활동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은 과거와 결별하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였다. 생물학에 대한 이 새로운 태도는 관찰 위주의 자연사에서 더욱 실험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실험실에 기반을 둔 형태의 연구로 주류가 이동했음을 반영했다. 이 시기의 거의 모든 과학 분야에서 그런 이동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자연사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엽적인 일이 되었고, 아마추어 자연학자의 영역으로 간주되거나 동물행동학, 생태학, 환경결정론이라는 새로운 과학으로 재편되었다. 물리학과 화학처럼 생물학도 주로 실내에서, 실험실에서, 통제된 조건에서 연구하는 것이 되었고, 점점 더 정부 기관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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