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반대 없이 전파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어서 때로는 역설적으로, 명백한 재난이 위협하거나 교회가 갑자기 반대를 받아 기도하며 헤쳐 나갈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제대로 가고 있다고 확신할 정도다. 그럴 때 복음은 원수가 점령한 영토를 침범했고, 원수는 싸울 의지가 분명했다. 여기서 원수는 마술의 세력이었는데, 사도행전 8장에서 이미 등장했고 19장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다. 한편에서는 현대적 회의주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무분별한 점성술과 초자연을 침범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횡행하는 기이한 분리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이 대목에서 거만하게 웃을 수 없다. 하늘과 땅에는 현대 서구 철학이 꿈꾸었던 것 이상의 것들이 있고,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위험하다.
--- pp.22-23 ‘행 13:1-12 사명과 마술’ 중에서
회당은 단순히 예배 장소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각 지역의 유대인들이 모이는 지역 사회 센터였다. 함께 모여서 온갖 사안들을 제기하고 의논하는 장소였다. 오늘날의 도시나 마을에서 당시의 회당에 해당하는 곳은 ‘종교적’ 건물보다는 오히려 ‘공공 광장’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말 그대로 공공 광장일 수도 있고, 대회의실, 정부 사무실, 시청, 의료 시설, 경찰서 등 현대의 시민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의 네트워크일 수도 있다. 거기서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메시지가 아닐 것이다. 사적인 영성 차원으로 받아들이거나, 죽으면 ‘천국’(하늘)에 갈 것이라는 도피주의적 희망을 안고 살면서 몇 가지 도덕만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들을 수 있는 그런 메시지는 아닐 것이다. 그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바울이 회당에서 전했던 것과 의미가 같은 메시지일 것이다. 즉, 너희가 바라던 것이 여기에 있으나 너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 pp.50-51 ‘행 14:1-7 이고니온’ 중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이 처한 혼란 전체?인간의 반역, 우상숭배와 죄, 인간 생명과 관계의 부패, 우주의 오염, 전 세계적인 경제적 착취의 구조 등에서부터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이 엉망인 상황, 이 갑작스런 위기,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거나 슬픔이나 두려움에 빠진 이 사람, 의도적 죄로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두운 장애물을 놓아 버린 이 사람에 이르기까지?에 ‘현재 세상의 모습’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것을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다스리실 때의 세상의 모습, 그러나 실은 예수님이 이미 주님으로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모습’과 대치시킨다. 다만 그분의 통치는 인간이 그 주권을 인정해야만 확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구출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질문의 수준과 의미에 상관없이 언제나 ‘주 예수를 믿는 것’이 된다.
--- pp.105-106 ‘행 16:25-34 지진과 구원’ 중에서
누가가 이 책을 쓴 것은 기독교는 그저 사람들에게 좋은 시민이 되라고 격려하는 평화로운 운동임을 당국에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구절을 보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바로 세상을 뒤엎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다. 바울을 계속 추궁했다면 그는 자신들이 실제로 세상을 뒤집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세상은 현재 거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단지 새로운 종교적 체험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창조자가 마침내 모든 것을 바로잡고 있다고 세상에 선언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을 것이다.
--- p.120 ‘행 17:1-9 또 다른 왕!’ 중에서
복음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로잡으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 마지막에 그렇게 하실 것, 그 마지막에 대한 표지나 수단으로서 각 개인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누가는 독자들이 교회의 삶도 그런 방식으로 보기를 원한다. 우리는 편안한 삶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우리를 내버려 둘 것이라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나 공적 영역에서의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나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바로잡음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신다면, 그리고 최후에 바로잡으실것을 우리가 예견한다면,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갈 때, 때로는 순교로 그리고 때로는 인정과 무죄 선고로, 불편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잡음이 곳곳에서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한다.
--- pp.271-272 ‘행 24:10-21 희망에 대한 변호’ 중에서
믿음만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배운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말한다. 그렇다면 아직 십자가를 지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라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메시아 예수의 복음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바로 그것을 지닌 사람은 자기 영혼에 그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작은 배로 보는 관점이 당대에는 아직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폭풍은 그 여행이 헛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의미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시는데 이 세상의 세력은 거기에 최대한 저항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휩쓸린 사람은 십자가의 표시를 제대로 알아보아야 하고, 갈보리의 유일무이한 사건을 통해 이미 얻은 승리를 주장해야 한다. “바울아, 두려워 마라. 너는 반드시 황제 앞에 서야 한다.”
--- pp.329-330 ‘행 27:13-32 폭풍과 천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