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때는 1350년이다. 얼마 전 시력을 잃은 78세의 베네딕트회 노수도사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본다. 그의 이름은 질 리 뮈지이다. 문학을 따로 익힌 적이 없었고 18세에 투르네의 생마르탱 수도원에 들어왔던 그는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읽었던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가 읽은 것은 이전 세기의 여러 작가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몰리앵의 은둔자였던 어느 수도사의 작품들이 있다. ---p. 25
프랑스어의 경우 중세 문학은 9~12세기에 형성된다. 긴 관점에 서 본다면, 14세기 역시 이 형성기에서 매우 가까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근접성으로 인해 당시 시인들은 자신들을 그 형성기의 자식들로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낡아버린 세계에서 떠도는 자식들이었다. 이러한 모순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당대의 문학에는 고유한 색, 다시 말해 멜랑콜리의 색이 칠해진다. 모든 것이 프랑스어로 재창조되어야 했던 문학의 봄, 즐거운 환희의 시절, 선구자들의 시절이 과거 12세기에 있었다. 반대로 14세기는 자신들의 시대를 문학의 겨울, 자기 내면으로의 은거, 칩거와 성찰 그리고 노년의 시절로 바라보았다. ---p. 28
메네스트렐m?n?strel이라 불리는 음유시인은 종글뢰르jongleur로 불렸던 유랑예인의 현대적 ‘현신avatar’이다. 그러나 이 명칭의 어원이 알려주듯, 음유시인은 이제 하나의 소임을 가지고 있고, 어느 영주, 어느 가문, 어느 군주에게 속하며, 때로는 당대의 새로운 경향처럼 어느 유력한 상인에게 속하기도 한다. ---p. 65
사랑의 궁정은 “모든 귀부인들과 젊은 아가씨들에게 경의와 칭송을 표하고, 조언과 봉사를 바치기 위해? l’honneur, louange, recommandacion et service de toutes dames etdamoiselles” ‘겸허humilit?’와 ‘충실loyaut?’이라는 두 가지 미덕의 기치를 걸고 만들어진다. 사랑의 궁정을 주재한 이는 그곳의 군주이자 헌장의 기안자인 피에르 드 오트빌Pierre de Hauteville로, 그는 1376년에 태어나 1448년 10월 1일 릴에서 사망한 시인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피후견인이었다. 사랑을 숭상하는 문학적인 회합, 축제와도 같은 회합이었던 사랑의 궁정은 매달 첫번째 일요일, 그리고 상징적 의의에 따라 정해진 특정 일자, 이를테면 성 발렌티누스 축일이나 5월의 어느 날, 성모를 기리는 다섯 차례의 축제일 가운데 하루에 즐거운 축제인 “사랑의 시연장을 개최tenir joieuse feste de puy d’amours”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p. 80
사실, 사랑의 궁정을 편제하는 데 직접적인 모델이 된 것은 헌장이 명백히 암시하고 있는 시연장들 또는 ‘수사적인 법정들chambres de rh?torique’이었을 것이다. 피에르 드 오트빌은 이러한 모임들이 활발히 꽃피었던 북부 프랑스에서 온 인물이었고, 제시된 후렴구에 따라 발라드를 만드는 것, 성모를 경배하는 시serventois를 짓는 것, 만찬과 미사, “즐거이 소일하기 위한pour plaisant passetempz”사랑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논쟁 등, 사랑의 궁정이 채택한 활동들은 분명 시연장에서 행해졌던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의 궁정은 14~15세기에 만들어져 그 수가 증가되는 기사단의 설립과 유사한, 또다른 차원을 더한 것이기도 했다. 그 규약은 사실 일련의 이름들과 구성원들의 방패휘장 목록으로 이루어졌다. 사랑의 궁정은 부르주아적이면서도 도시적인 모델(시연장)과 기사들의 모델(기사단)이 교차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된다. 사랑의 궁정은 시작품을 만들고 유희를 펼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률의 제정?물론 유희 방식 안에서?과 사회적인 행실?아닌 게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도덕적인?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제의 탄생에서 사랑의 궁전이 지닌 양면성은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진지한, 나아가 장엄한 법률어가유희에 사용되는 한편 치밀한 체계화를 추구한 것은 여흥인 동시에 어떤 불안의 흔적이었다. ---p. 81
사랑의 궁정이 실제 현실에서는 조락 일로를 보이던 가치들을 부여잡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이 ‘충실’이었으나, 그 의미는 텍스트와 실제 행동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예들에서 드러나듯, 이중적인 말의 사용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손상된다. 또다른 조락하는 가치가 ‘즐거움’이었다. 사랑의 궁정은 “새로운 즐거움의 각성을 찾을”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그에 따라 사랑의 궁정을 창설한 행동은, 위기에 처한 한 사회를 삶과 미학 양면에서 지배적인 감정이 되어가던 멜랑콜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치료법처럼 구상되었다. 끝으로, 마지막 가치는‘안정’이었다. 사랑의 궁정 헌장은 운명의 여신과 그녀가 돌리는 수레바퀴의 영향에서 벗어난 체계 설립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통치 안정성 추구가, 다량의 수치화된 세목들에서 드러나는 거의 편집적인 체제 수립의 주도면밀함을 파생시킨 이유였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p. 86
마지막으로 사랑의 궁정의 규칙들을 어기는 자들, 또 지금 혹은 과거의 귀부인들을 중상하는 비방문을 쓰거나 쓰게 만드는 자들의 경우, 사랑의 궁정 기록부에 있는 그들의 방패휘장은 잿빛으로 칠해지게 될 터였다. “또한 그에 더해, 그의 이름과 성은 잿빛으로 칠해진 채로 방패에 그대로 남을 것이니, 그리하여 그의 명성이 누렸던 영광이 이제 사라져버렸음이, 또 온 나라에서 널리 멸시받게 되었다는 것이 보는 이들에게 드러나리라.” 수치마저도, 그 흔적을 남겨야만 한다. ---p. 89
주제의 고갈이라는 위기를 말하는 저 고통스러운 확인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외스타슈 데샹은 이렇게 말한다.
슬픈지고! 사람들 말하길 이제 나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하네,
지난날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것을 만들었던 내가.
그 이유인즉,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만들 수 있을
재료를 나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네. ---p. 94
이 카오스는 마치 숲처럼, 다시 말해 그리스인들의‘질료hyle’인 ‘최초의 질료materia prima’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신곡』의 초입에서 단테가 머물고 있는 어두운 숲이며(“말하기 힘든 것, 야생의, 모질고 거친”,「지옥」, 제1곡, 4~5행), 크리스틴드 피장이『오랜 학문의 길』(1131행)에서 환기시키는, 유년에 값하는 형태 없는 어두운 깊이인 저“숲silve”이다. ---p. 109
음유시인이 궁정에 있는 것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소임은 다른 이들이 담당한다. 전통적인 소재, 즉 기사 및 사랑과 결부된 소재를 부정하지 않고, 14세기의 작가들은 이런 소재를 변화시킬 수단을 실험했다. 그것이 바로 무구와 사랑의 쌍에 두 결합의 평형을 변화시키는 제3의 항을 맞붙이는 것이었다. 기욤 드 마쇼가 전념한 이 일은 실로 정교한 유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마쇼는『진실한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제시한다.
무구, 귀부인, 그리고 인식
또『운명의 치유약』에서는 아래와 같은 문구를 제시한다.
무구, 사랑, 다른 기예 혹은 문예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핵심은 양자 구조틀의 파열과 기존축의 어느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제3항, 혹은 일련의 3항들의 등장이었다. 의미 차원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정전화된 두 쌍 사이에 책, 문학, 성찰을 도입한다는 점이었다. 책이 무구와 사랑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당대의 사고틀이었던 ‘인생의 시기’ 이론과 조화를 이루며 진행되었다. 이 이론의 항들을 사용하여 저마다 개인의 삶을 상정한다. 사람들은 이 격자 일람을 가지고 문학작품을 읽게 된다. ---p. 137
문자의 신비와 관련된 신화적 인물들의 세 유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유형은 마법사, 예언자의 모습으로, 이하 내용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상될 것이다. 몇몇 그리스어 텍스트에서 오르페우스가 알파벳의 창시자로 제시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두번째는 필경사, 중계자, 서기의 모습으로, 이집트의 신 토트의 모습을 띤다. 세번째는 시조가 되는 영웅으로, 알파벳의 창안자인 동시에 도시의 설립자이다. ---p. 169
이 모든 작가들에게, 학문은 하나의 길이었으며(크리스틴 드 피장이 자신의 작품 가운데 하나에 붙인 『오랜 학문의 길』이라는 제명을 생각해보라), 그 모델들 가운데 하나가 삶 자체였고, 기욤 드 디귈빌이 쓴 작품 제명에 따르자면 인간 삶의 순례였다. 장 르 페브르는 충고한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빌어먹건 간에,
진정한 학생이 아니다.
이 때문에 그려보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 것이 적절한지를,
바로 우리 자신 안에서, 따져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우리 왔는지를,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인류의 후손인 우리.
---pp. 173~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