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전체 글을 마무리하면서 이 땅에서 기독교 대안교육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것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관한 핵심사항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한국교회의 맹점 중 하나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성, 신앙과 교육 및 신앙과 학문의 부조화성이다.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성도들은 언어적 유신론자이지만 생활적 무신론자이며, 고백적 유신론자이지만 실천적 무신론자로서 살아간다. 그들은 일상의 삶에서, 가정과 직장에서, 그리고 학문과 교육에서 가히 하나님 없는 자들처럼 살아간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땅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 주일의 예배자만이 아니라 몸의 예배자, 삶의 예배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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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의 마음에서만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도 살아계시는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마16:16)에서,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무엇보다 ‘살아계신’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짤막한 신앙고백에서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계심’을 강조하게 하신 것이다. 주님의 ‘살아계심’은 그 자체로는 존재의 성질을 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의 당위(當爲)로 다가온다. 즉, 주님께서는 살아계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연히 살아계셔야만 하고, 또 세상에 대해서도 마땅히 살아계셔야만 하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2) 기독교 대안교육은 하나님의 부재현상으로 빚어진 인간의 위기, 학문의 위기,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표방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야말로 기독교 교육이 인간회복, 진리회복, 문명회복의 참된 대안이 될 수 있는 단초(端初)이며 출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즉 유신론적 기초 위에서 먼저는 바른 신앙고백을 가르치고 동시에 그런 신앙고백에 맞는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가르치고 확립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 위에서 바른 학문을 하며, 그런 인생관 위에서 전인교육을 받으며, 그런 가치관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꿈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학생들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 삶과 비전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과 자주성을 지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이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으로, 학생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의 주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주님이시며 왕이심을 가르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삶의 모든 영역들을 홀로 주관하고 통치하시도록 그분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것에 순종할 것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교육이다.”
3)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뭔가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이거나 기능적인 것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전인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려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모든 교육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서 참된 변화를 일으킬 수 없고, 따라서 참다운 교육을 시행하기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교육의 동인과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 교육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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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육원리와 방법, 내용, 목표는 당시의 아우구스투스 왕국의 교육과는 완전히 달랐다. 로마가 영웅심을 부각시켰다면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강조했고, 로마가 투쟁을 부각시켰다면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보훈(마5-7장)은 키케로(Cicero)나 퀸틸리아누스(Quintilianus)의 교육적 이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 하지만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영웅교육이 인간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반면, 팍스 크리스티아나(Pax Christiana)의 복음교육은 로마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을 그 근원에서부터 바꾼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대안교육 또한, 이천년 전에 그 견고했던 로마제국을 뒤엎었던 사도 바울의 복음처럼, 이 시대의 문명과 역사, 그리고 이 민족과 온 세상을 바꾸는 작은 겨자씨 하나, 또는 조그마한 누룩이 될 것이다.
---「결론: 기독교 대안교육의 종합적 의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