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Arnald)는 브레스기아(Brescia)의 강사로서, 많은 박해를 당한 후에, 로마에서 1145년 미사와 유아세례를 반대한다는 관점으로 로마에서 화형을 당했다.
12세기, 유아세례를 반대한 우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1139년에서 언급한 내용 중에 아놀드라는 이탈리아 브레스기아의 강사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아벨라드(Peter Abelard)에게 교육을 받고, 게다가 그는 미사와 성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유아세례를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황 이노센트 2세는 그에게 잠잠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과 스위스로 도망을 갔고, 거기서, 얼마동안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였다. 앞서 말한 교황이 죽은 이후, 그는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동역자들로 인해, 유게니우스(Eugenius)와 아드리안(Adrian)교황에 의해 혹독한 핍박을 받게되자, 그는 다시 프레드릭(Frederick Barbarossa)황제에게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왕은 그를 교황의 손으로 넘겨주었다. 결국 그는 로마의 형틀에 매달리게 되고, 사람들이 그를 숭상하지 않도록 아예, 불에 태워 재로 만든 후, 티베르(Tiber) 강으로 뿌리지게 되었다. 이 일은 1145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그는 약 6년 동안 위와 같은 교리를 주장하게 되었다(침례사 598).
멜리누스(Abraham Mellinus)는 아놀드에 대한 믿음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또한 제단의 성찬에 관해 기존 교리와 다르게 가르쳤을 뿐더러, 유아세례에 대해서도 로마 교회의 주장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현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는 이와같은 면에서, 부루이즈(Peter de Bruis)와 툴루즈의 헨리(Henry)의 관점을 고수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성변화를 반대하며, 미사는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세례나 다른 사람의 믿음이 유아를 구원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조- 사실 아놀드의 믿음에 관해 이야기한 멜리누스는, 성 안토니의 간척지에 있는 칼빈 측 교회 설교자로서, 유아세례의 주창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놀드에에 관해 말하기를, 그는 유아세례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룩한 순교자 중의 하나로 인정했다. 또한 이 침례와 다른 사람의 믿음은 아이를 구원하지 않을뿐더러, 로마 교회가 주장한 것들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관찰- 그가 주장하고 공포하며 가르친 교리로 인해, 그에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모든 상황을 이겨내며 끝까지 고수했다는 것이다.
피터 브루이즈(Peter Bruis)는 성 길레즈에서 화형을 당했다. 툴루즈의 헨리는 교황의 사절단에 의해 체포되고, 그 외 많은 다른 사람들은 참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1145년과 1147년 파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튀위스크는 그의 연대기 부분 1145년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 맘 때쯤 프랑스에는 유명한 브루이즈가 있었다. 그는 전 성직자이며, 그의 제자인 툴루즈의 헨리 또한 성직자로서, 아주 학식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황의 잘못에 대해 크든 작든 지적을 하였다. 그들은 교황을 소돔의 군주로 부르고, 로마시를 모든 불의와 가증스러움과 혐오의 모체로 보았다. 그들은 미사와 우상과 순례와 로마 교회의 다른 제도에 관해서 계속해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반박하였으며, 오직 믿는 사람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피터는 1126년부터 114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설교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를 따랐고, 그는 마침내 성 길레즈(St Giles) 또는 성 에기디우스(Aegidius)라는 곳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그가 끔찍한 핍박을 받고 죽은 후, 그의 교리를 따르는 많은 무리가 일어났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요약하면, 주교들은 군주들과 세속권력자들의 도움을 빌어 그들의 머리를 밀고, 먼저 이들을 명성을 떨어뜨리고자, 그들을 파문하며, 그들을 추방하여, 아나테마라는 가톨릭식 저주를 선포하며, 십자군을 선포하며, 앞서 말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면권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고문 도구를 동원하여, 즉 불, 교수대와 잔인하게 피 흘리기를 자행하므로, 온 세계는 이로 인해 혼돈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교리가 전역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폭군은 잔인한 도구를 동원하며 설득하였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1304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파리에서 죽임을 맞이하거나 화형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그들의 후손들은 온갖 고난을 겪은 후, 지금까지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