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들은 라틴어로 쓰였다. 루터는 학자들과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토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일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처음에 기뻐했던 것 이상이었다. 불꽃 없이 은근히 타오르던 교회에 대한 비판이 폭발했다. 논제들은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14일 안에 전 독일에 퍼졌다.“마치 천사가 심부름꾼인 것 같았다.”논제들은 당시까지 무명의 루터를 단숨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하늘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으며 세상을 불길 속에 놓는 것’같았다. 그는 자신의 용기에 놀랐다.“그 노래는 내 목소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높아지려 했다.”잘 알다시피, 논제들은 면죄에 반대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루터의 군주도 평생 면죄의 효력이 있는 성유물을 보관했다. 루터의 논제는 면죄의 오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 p.59, 면죄 설교자의 뻔뻔스러운 말에 맞서다
로마가 1521년 1월 3일 최종적인 파문칙서를 발행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파문경고칙서서 교황으로부터‘거친 멧돼지’,‘짐승’이라고 불린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로마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는 이단자로 여겨졌다. 1520년에“그 사람은 내게서 잘근잘근 씹을 고슴도치 한 마리를 발견했다.” 루터는 이렇게 반박하고 생애 내내 이 높으신 분에게 뻣뻣하게 굴었다. 루터의 글 중 다수는 루터의 주요 적대자인 교황과 교황의 추종자인‘로마 추종자들’혹은‘교황 신봉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로마교회는 그에게‘악마의 창녀’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루터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정곡을 찔렀다. ---p .64-65, 저는 여기 서 있고,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생애 후기의 어마어마한 작업 성과는 동료들과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여기서 제1순위에는 터보다 14년 연하의 필리프 멜란히톤이 있다. 그는 27년간이나 루터의 업적을 보충하고 첨가했다.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에 긴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복음을 배웠다”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루터를 존중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또한 루터의 특이한 성품에 시달렸고, 루터에게 ‘광포한 헤라클레스’ 혹은 ‘선동 정치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으며, 이렇게 한탄한 적도 있다.“루터가 한 번만이라도 입을 좀 다물었으면!”반면 루터는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고 타협을 위해 애쓰는 멜란히톤의 태도에 전혀 감동받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불화는 없었다. 독일과 전 세계, 적어도 중부와 북부 유럽의 종교개혁이라는 그들의 공동 관심사가 컸기 때문이다. 훗날 두 사람은 당연히 비텐베르크 성 부속교회에 나란히 묻혔다. --- p.133-134, 인간은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루터는 《기독교도적 삶의 총계》에서 “모든 계급의 각자가 어떻게 자신에게 명령된 임무를 수행하며, 사랑의 활동을 연습해야 하는지, 그대는 이를 그 계급을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즉 주어진 규율을 지키는 세상의 모든 직업, 활동과 노동은 믿음과 사랑의 행위로, 이는 성스러운 것이다. 루터를 통해 인간의 노동은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평가절상되었다. “어떤 인간도 노동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함과 빈둥거림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왜냐하면 새가 날기 위해 태어났듯, 인간은 노동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 p.187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
루터의 신학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급진적 사고에서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올바른 신학은 루터가 제시한 기본적인 질문을 지나칠 수 없다. 이것은 분명 모든 기독교 종파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근본적인 업적에 대해 루터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항상 자부심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영역인 문화적?정신사적 성과의 영역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조심스럽고 이중적인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여기서도 루터의 업적이 이룬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루터는 근본적으로는 새 시대의 세속화 과정에 거부하는 입장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 ‘세속화’ 경향에 탄약을 보급한 사람은 루터다. 그가 믿음에 관한 것과 세속의 관심사를 분명하게 구분했고, 세상은 ‘세속적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고 확고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기독교, 믿음의 배반을 루터는 악마의 행위로만 설명할 수 있었다. 그에게 양심의 자유란 분리가 아니라 깊은 구속을 의미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 안에 사로잡혀 있다.” --- p.225-227, 사람들이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를
옛 시대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눈다면, “루터가 중세의 사람인지 아니면 최초의 근대적 인간인지”(실링) 묻게 된다. 프랑스의 위대한 루터 연구가 뤼시앵 페브르는, 젊은 루터는 ‘신앙심 깊은 천재’, 혁명가였다고 평가하며, 초기의 루터를 참으로 위대한 개혁자로 보았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독일 교회사가 하이코 오버만은 페브르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마르틴 루터만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사는 독일 출발의 역사로 근대에 기입되었을 것이다.” 오버만은 루터를 근대적으로 보지 않았다. ……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조금 더 확장시킬 수 있다. 루터는 우리에게 세 가지 측면을 보여 준다. 첫째, 그는 중세에 사로잡혀 있다. 즉 봉건적 계급 질서를 완고하게 고집했다. 둘째, 그는 교회의 후견과 전통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셋째, 그는 모든 시대와 일반적인 인간 사고에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의를 급진적으로 알렸다. 바로 이 점에 시대를 초월한 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p.230-231, 사람들이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