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 가는 추운 겨울날, 평상복 차림의 두 남성과 검은 도복을 입은 사내가 은밀히 궐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다급한지 그들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폐비 신 씨의 거처에 당도하였다.
“자네 둘은 밖에서 기다리게. 내가 들어가서 아기를 안고 나오겠네.”
“예, 전하.”
남곤과 그의 수하가 대답하였다. 중종은 그 둘을 뒤로 하고 산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인! 내가 왔소!”
“어머, 전하. 입궐하신 지가 채 하루도 안 되셨는데 또 미행을 나오신 겁니까?”
신 씨는 놀라며 남편의 용태를 살폈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필시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리라.
“부인. 내 설명은 나중에 하겠소. 아이를 내게 주시오.”
“전하, 무슨 일이기에 이 추운 날 갓난아기를 데려간다 하심입니까?”
“시간이 없소. 서두르시오.”
“하면 소첩도 따라 나서겠나이다.”
신 씨는 아이를 두툼한 이불로 싸안으며 말했다. 중종은 애가 타고 목이 메었다. 그는 결심한 듯 신 씨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안고 몸을 돌렸다.
“나서지 마시오, 부인. 아이를 노리는 자들이 습격해 올 것이오. 아이를 피신시켜야 하니 부인은 이곳에 머물러 계시오.”
중종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신 씨는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품속에서 반딧불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아기의 옷자락에 매달아주었다.
“전하, 조심하옵소서.”
“걱정 마시오, 부인. 내 다시 오겠소.”
중종은 서둘러 폐비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미 도승지가 보낸 자객이 놓치지 않고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자객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임금과 남곤은 두 갈래로 찢어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중종은 추격자들을 물리치고 어느 한적한 마을에 다다랐다. 중종은 품에 안은 아기를 살펴보았다.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이름도 지어주지 못했구나, 아가. 내 너를 안고 다시 궐로 들어간다면 네 목숨이나 네 어미의 목숨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 터. 여기서 너와 이별하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리라. 아비가 힘이 없어 미안하구나.”
중종은 도포자락에서 미리 적어놓은 서신과 자신이 끼고 있던 금가락지와 돈이 될 만한 몇 가지 장신구를 꺼내 아기를 싸고 있는 이불자락에 넣었다. 아이를 잘 돌봐달라는 의미로 돈도 백 냥 함께 넣었다. 그리고는 조용한 어느 기와집 문 앞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후일 이곳으로 널 찾으러 오마. 기다리려무나.”
중종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새벽녘. 이상하리만큼 한적한 마을을 파리하게 머리를 깎은 승려가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역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피신하여 인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마을이었다. 그도 인근에 머무르다 마을을 잠시 살피러 사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려왔다.
“아니, 웬 아기 울음소리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얼마를 걷다보니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어느 대문 앞에서 배가 고팠는지, 어미가 없어 불안했는지 악을 쓰고 울고 있었다.
그가 아기를 품에 안자 지친 아기는 안심이 되었는지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찬찬히 아기를 살펴보다가 이름 없는 서찰을 발견하였다.
[아기를 부탁합니다. 생시는 병인년 12월 31일 진시입니다. 아명은 아직 짓지 못했습니다.]
급하게 쓴 글인지 글자가 휘갈겨져 있었다. 그는 또 서찰 외에 백 냥과 금붙이, 값나가는 장신구들도 발견했다. 역병에 공양하러 오는 이가 끊겨 사찰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이 아이를 만난 것은 부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그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잰 걸음으로 운악사로 돌아왔다.
그가 기거하는 곳은 주지스님과 그, 그리고 동자승 한 명이 식솔의 전부인 작은 사찰이었다. 규모가 작아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주를 받으러 나갔던 그가 아직 이른 시간에 다시 갓난아기와 돌아오자 주지승은 놀라며 말을 꺼냈다.
“수양하러 나갔던 자네가 덕은 쌓지 않고 웬 아기를 안고 돌아오는가?”
“이 아기가 제가 쌓아야 할 덕인가 봅니다. 부처님께서 이끄셨는지 아래 역병이 돌았던 마을에서 버려진 이 아기를 만났습니다.”
“호오.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기에 이리 만났단 말인가? 아명은 있는가?”
“아니요. 생시만 적혀 있었습니다. 아명을 지어주시지요.”
그는 서찰을 주지에게 건넸다.
“자네는 아기가 먹을 숭늉을 좀 끓여보게. 지금은 젖동냥 할 곳이 없으니 그것이라도 먹여보세.”
“예.”
주지는 아이를 받아서 방안으로 총총 사라졌다.
“웬 아기입니까, 주지스님?”
이제 예닐곱 살로 보이는 어린 동자승이 방으로 들어왔다.
“성희가 시주 나갔다가 만났다 하는구나.”
“이름이 뭐예요? 여자에요, 남자에요?”
“여자아이인데 이름은 없구나. 아명을 지어줄 것이다.”
“네, 스님. 제가 한번 안아 봐도 돼요?”
“아가가 예쁜 게로구나. 그래 보렴.”
동자승은 고아로 절에 버려져 길러졌다. 그 탓에 제 또래들과도 제대로 어울려보지 못했던지라 아기가 마냥 신기하고 예뻤다. 소년이 아기를 안고 어르고 있을 때 성희라는 승려가 들어왔다.
“동아, 아기가 맘에 드는 모양이구나. 숭늉을 좀 끓였는데 아기에게 먹여보자꾸나.”
“네. 성희 스님.”
세 남자는 아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아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기는 배가 고팠는지 젖이 아님에도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숭늉을 다 받아 마셨다. 그때 배냇저고리에 매달린, 비싸 보이진 않지만 옥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노리개가 노승의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이 아이의 이름은 반딧불 린에서 따와 옥린이라 지어야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