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천신학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다. 즉, 실천신학이란 “교회의 실천 사항들이 세상의 실천 사항들과 상호 작용을 할 때, 전자를 비판적으로, 신학적으로 숙고하는 것”(Swinton & Mowat 2006: 5) 그 이상을 의미한다. 실천신학은 그 자체로 건설적 신학으로, 여기에서 모든 범주의 성경 주해와 교리 관련 공식 표현은 지속적 고려와 비평에 열려 있다. 더욱이 나는 페미니스트 신학자로서, 다른 페미니스트, 해방주의 신학자, 그리고 후기 식민주의 신학자들과 더불어 다음의 주장을 수용한다. 즉, 인간 경험은 권위 있는 신학적 원천이다(예. Gutierrez 1987; Cone 1997; Lartey 2003; Isasi-Diaz 2004).
기준과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즉, “좋은” 신학이란 모름지기 치유와 자유함에 기여해야 하고, 또 치유와 자유함의 기여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 결과 기독교 공동체의 실천과 관련을 맺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예. Larty 2003). 영국 성공회 신자로서, 나는 성경과 전통, 그리고 이성 및 경험을 신학적 숙고의 유효한 자료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실천신학자로서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다음 이성에 의해 해석되는 성경과 전통으로 이동하면서 현재도 지속 중인 신학적 숙고와, 고난에 대한 개인적, 공동체적 반응의 창조적 형성을 다룰 것이다. --- p.67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는 “부의 위험”이란 제목의 디모데전서 6:9에 대한 설교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우리는 “삶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상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겸손, 온유, 인내, 자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쫓아 십자가를 지고 가는 능력, 자비롭고 경건한 행위에 대한 열정을 위태롭게 만든다(Wesley 1991: 452-463). 다시 말해, 웨슬리가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소비를 위한 부의 획득에 성공할 경우 영적 능력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고려의 대상이 아닌 소비 행위를 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는 일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가장 명확한 연계성이 소비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 및 창조 세계의 돌봄 그리고 가난 및 공정 노동 행위에 관한 정의 사이에서 종종 제시된다. 이웃 사랑 개념을 확장하여 전 지구에 있는 이웃들을 포함시킨다면, 내 집의 아름다움에 가용한 완벽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미명하에 이러한 이웃들을 착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 p.170
효과적인 목회 돌봄은 도움을 요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희망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요구한다. “전문가” 역할을 하기보다 자신과 함께 앉아 있는 자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일은 “고요한 [혹은 평안한] 경청”과 같은 훌륭한 기술들(Kornfeld 2002: 47)과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힘을 부여하는 증인의 능력을 요한다. 증인이 되는 일은 무엇인가를 “하려” 애쓰지 않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증인은 “무엇이 발생하게 한다거나, 고친다거나,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Dittes 1999:137). 그러나 증인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이 고통을 이해하려 할 때 옆에서 응원해 준다. 돌봄 제공자는 새로운 기술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타인의 삶이나 치유 과정에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돌봄 제공자는 당사자가 원하는 치유에 대하여 신뢰할 수 있는 증언을 제공한다. 효과적인 돌봄 제공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고난을 사유하고, 이해하고, 통합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이유로, 1972년 헨리 나우엔이 제시한 목회 돌봄 제공자들에 대한 악명 높은 이미지인 “상처 입은 치유자”는 목회적 돌범 실천에 있어서 중요한 무언가를 지시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목회 돌봄 제공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역할을, 고치는 자들이 아닌 조장자(facilitators)로 이해한다. 이러한 지혜를 배우는 데는 수년이 걸릴 수 있고, 때로는 끝까지 습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돌봄을 위해 이러한 지혜는 필요하다. 때로 이러한 자질은 보다 많은 지침이 적절한 목회의 도덕적, 영적 기능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전자가 후자보다 더 적합한 때를 아는 것 역시 지혜로운 지침이 지닌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이다. --- pp.549-550
예배의 변화로 인해 지난 반세기 동안 지역 교회들은 예배의 의미를 협상하는 데 보다 의식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그 결과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의 예배 관련 가르침은 간학문적 접근의 필요성을 만들었다. 예전신학은 확실히 현상학적, 해석학적 변화를 겪었다. 다수의 방법이 예배 연구로 집중되어 기독교 정체성의 특별함을 밝히고 어떻게 신학적 이해가 예배를 통해 중재되는지 알려준다. 이러한 통합은 돈 브라우닝(Don Browning 1991)의 표현인 “전략적 실천신학”에 암시되어 있다. 즉 이와 같은 통합은 종교적 공동체의 삶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구체적 행위들의 해석과 직결되어 있는 보다 큰 해석적 틀을제공하고자 한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 2001)의 『기독교 예배학 개론』(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CLC 刊)은 현상학적 변화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전 교제들은 첫 장에서 대표 기도, 설교, 성찬식의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으로 시간, 공간, 소리의 언어를 다루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난 20년간 출판된 다른 여러 책과 마찬가지로 청교도 예배학자에 의해 저술되었는데 신학교들과 몇몇 지역 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 pp.584-585
“실천신학의 향방을 정할 기본 과제는 신실한 제자도를 증진시키는 일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고 “그들이 지금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증언”한다(Cahalan and Nieman 2008: 67). 신실한 제자도 육성은 사실 실천신학과 기독교 영성 연구, 이 둘 모두의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천신학자들은 실천의 본질에 대한 풍성한 이해, 전통과 현대적 정황 사이의 중대한 대화를 형성하는 방법들, 그리고 분명하게 발달하면서도 변형적 목적을 가져올 수 있다. 카시안과 사막 영성에 대한 이전 논의에서처럼, 실천은 영성의 핵심이다. 실천은 우리의 믿음을 적용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영적 실천은 사람들이 신실한 삶을 살게 하고, 그들이 거룩의 무언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실천을 기도, 성경 읽기, 성경 묵상, 예배 참여, 영적 지침, 그리고 자선 행위로 강조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다른 자료로부터 영적 행위에 관해 배우려고 애쓰지만,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가 저술한 『영혼의 성』(Interior Castle) 혹은 베네딕트(Benedict)가 저술한 『규칙서』(Rule) 같은 기독교 고전들은 영적 삶에 필수가 되는 무언가를 말해 준다. --- p.662
복음주의의 세계적인 운동은 세계의 종교적 상황을 형성하는 하나의 대세이다. 본 장은 복음주의의 역사적, 신학적 정체성, 동맹, 그리고 학문을 북아메리카에 집중해서 간략하게 살펴봤다. 백인-미국 복음주의 동맹은 초기 복음주의 운동의 요람 역할을 했다. 세계 복음주의는 그 요람보다 훨씬 커졌다. 21세기 실천신학은 복음주의를 이해하고, 공동체들 안에서 돌봄과 훈련의 사역들을 진전시키고, 하나님의 선교 속에서의 능동적인 역할을 숙고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p.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