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토막 일기
이삼십 년 전부터 시간 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보고 듣고 겪었던 바를 몇 자씩 적어보았습니다. 내 나이 구십이 되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 앞서 글을 한데 모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닙니다만, 여자를 멸시하고 천대하던 시절에 개화된 서민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고등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글은 보통 사람의 일기장 같은 거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궁핍한 조선 사람으로 생애를 시작했던 나는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6·25 전쟁을 다 겪었습니다. 완전히 잿더미가 된 이 강산에서 안간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이겨내왔고, 그간의 생활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다만 일찍이 개화되어 이조 말부터 서양문화를 받아들인 부모님이 의사가 되고 교사가 되어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봉사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교육만이 이 나라가 다시 일어나 살 길이라고 우리를 격려해 주셨고, 의술을 통하여 모두에게 봉사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나 자신도 의료봉사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여의사로서,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이자 사회인으로서 일인 다역으로 바쁘게 살아오고 보니 그동안 많은 실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내 삶의 토막 일기에 가깝습니다. 누구에게 읽어 주십사고 적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복해서 기술된 곳도 많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본명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살아계시는 분들은 가급적 양해를 구하였지만, 이미 작고하신 분들에게는 지면을 통해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 글을 책으로 엮기에 앞서 사랑하는 아들의 권면(勸勉)과 또 도움 주신 여러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둘째 딸 명화와 외손주 준환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 「머리말」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늙어 죽을 때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어려운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또 슬픈 일도 당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한 고비들을 어떻게 잘 견디고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아름답다든지 실패했다든지 하는 평가를 받게 된다.
아득한 지난날을 회상해보면, 힘겹고 슬픈 일이나 즐거운 일들은 아련한 안개 속에 사라지고 그리움만 남게 된다. 이럴 때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얼마나 후회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기쁘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분자(分子)와 세포로 구성된 물질에 지나지 않은 우리 육체는 혼과 영이 융합되어 인간을 구성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사랑, 충성, 믿음과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 탐구하는 마음 등을 오로지 인간의 전유물(專有物)로 주신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나의 삶을 돌이켜볼 때 남편이 하늘나라로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만족스럽고 기쁜 일생이었다.
첫 번째로 100여 년 전 구한말(舊韓末) 암흑기에 할머니가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가문에 빛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지혜와 지식을 중요시하는 기독교가 신앙 안에서 자손들을 열심히 교육시키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집안의 개화가 속히 이루어지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교육을 받았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3·1 대한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해 옥고를 치르는 가시밭길을 걸어오는 과정에서도 우리 여섯 자매를 교육시켜 주셨다. 비록 큰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하였지만 사람으로서 품위를 갖출 수 있게 키워주셨던 것이다.
두 번째로 부모님이 우리를 성장기 동안 믿음 안에서 양육하고 나아가 고등교육도 받게 해주심으로써 순종하며 부모님 뜻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분은 우리 자매들에게 나눔과 봉사의 기쁨도 몸소 알게 해주셨다. 비록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의사인 아버지가 의료봉사하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에 그 뜻에 순종하며 의료봉사의 기쁨을 누리며 걸어왔다. 이런 나의 길이 만족스럽다.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길을 택할 것이다.
내 나이 94세를 맞이하여 젊은 날의 허다한 일들은 덮어두고 나의 인생을 돌아보며 나의 황혼의 생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나날이었나를 회상해보고자 한다. 의료봉사는 나에게 큰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었고, 이 나이에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된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본과에 올라간 여름방학에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세상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좌우충돌과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으로 학교 수업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때였다. 독서를 즐기던 나는 가끔 일본 교토 동지사(同志社)대학 철학과를 다니다 귀국한 친척 오빠 집에 놀러 가 그의 철학 이야기를 즐겨 듣곤 하였다. 때마침 놀러 왔던 사람이 일본 교토부립(京都府立) 의과대학 본과에 다니던 오빠 친구였다. 그도 역시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야기가 잘 통하니 절로 친해졌다.
이윽고 그의 학문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예리한 통찰력에 마음이 끌려 사랑하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그는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서울대 물리학과로 전과를 했다. 그는 멋진 청년이었다. 언니들이 ‘원주도 연애할 줄 아는가 봐.’하며 놀라워했다. 집안에서 고지식하고 소심하기로 정평이 난 나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우리는 만난 지 3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사회가 미처 정비되기도 전의 일인데, 이승만 대통령이 만성적인 전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원자력 개발에 발 벗고 나섰다. 1956년 서둘러 한미원자력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1959년에는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소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이자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이던 박철재 (1905~1970) 박사였다.
그런데 원자력 불모지인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인재 양성이 먼저였다. 그랬기에 정부는 전후의 취약한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젊은 물리학도를 선별해 미국과 영국으로 국비 연수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이때 1차로 파견된 사람이 바로 윤세원 씨와 내 남편이었다. 1956년 4월의 일로, 두 사람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아르곤 국립원자력 연구소(Argon National Laboratory) 부설 국제원자력학교(School of Nuclear Science and Engineering)에 파견되어 연수를 받았다. 1년여의 연수가 끝난 후 두 분은 귀국하여 윤 교수는 문교부 박철재 국장 밑에서 초대 원자력 과장을 맡아 원자력 개발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역할을 맡았고, 남편은 미국에 다시 돌아가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연구실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던 남편이 1959년에 나의 미국행을 주선했다. 당시에는 부부가 함께 외국에 나가는 것을 막는 제도가 존재했기에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나의 미국행은 성사되었다. 국내에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여행자가 소지할 수 있는 금액은 단돈 100달러에 불과했다. 고지식하기 짝이 없던 촌 아줌마는 달랑 100달러만 손에 쥐고 수만 리 길을 떠났다. 그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모험이었다.
한국에서는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새로 과정을 밟아야 했다. 나는 시카고병원에서 인턴에서부터 출발했다. 때마침 외국인을 위한 ECFMG(Education Commission for Foreign Medical Graduates) 미국 의사시험제도가 공포되어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내과부터 공부하는 것이 순서인데, 공부할수록 내과가 재미있었다. 결국 레지던트는 내과를 선택하여 내 전공을 바꾸고 말았다. 이어서 메릴랜드병원에서 내과 치프 레지던트까지 마치고 미국 원호병원에 취직했다.
나는 미국에 영주할 작정을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남편이 먼저 귀국하게 되면서, 몇 년을 미국에서 더 버티다가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까닭에 후일의 나의 의료봉사는 내과의로서 순풍에 돛 단 듯이 진행되었다. 왜 그때 내가 전공을 바꾸게 됐을까? 무슨 까닭으로? 지금 와서 생각하니, 오늘이 있기 위하여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1968년 내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의 기억이다. 남편이 손가락 끝에 작은 칩을 올려놓고 물었다.
“당신, 이게 뭔지 알아?”
“뭔데?”
“반도체라는 건데, 두고 봐. 장차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거야.”
또 500원짜리만 한 얇은 검은색 원반을 보이면서 이런 말도 했다.
“이것이 장차 태양열 발전(發電)에 쓰이면서 대체에너지로 각광받을 거야.”
그리고 실리콘이 어쩌고저쩌고하는데도, 나는 뭔지도 모르고 “그래?”하고 대꾸할 뿐이었다. 50여 년 전의 우리 집 안방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그때는 국내에 반도체가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과학기술 담당 비서관 오원철 씨에게 반도체 문제로 전화 대화를 시도했다가 묵살당한 일도 있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1978년 그해 여름. 남편은 일본에서 개최된 태양열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막 귀국하여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잠이 안 와요?”
“연구를 하기에는 조건이 너무 열악해. 가망이 없어. 보직이나 즐기며 앉아 있으라고?”
마침, 문리대 대학원 원장 발령이 나 있을 때였다. 그는 보직보다는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원했었다. 누구도 이해 못 했지만, 그를 잘 아는 나는 그를 이해한다. 비록 가정적이지는 못한 남편이었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자기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학교 연구실에서 할 수 없는 실험들을 개인 연구실에서 하느라, 나의 병원 수입을 모조리 탕진하곤 했던 사람이다. 내 수입으로는 도저히 그의 연구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개인 병원을 열었는데, 여의사가 하는 병원이다 보니 내과 환자는 드물고 산부인과 환자들이 밀려왔다. 환자들 사이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가정생활에 소홀해지고 남편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치 죄인이 된 심정이라고 할까.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죽음은 나의 육신과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당혹게 했다. 특히 그의 순수한 학구열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해하고 있던 나는 번뇌가 클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가고 나니 나의 인생관이 바뀌었다. 재물도 명예도 지위도 부질없는 것이라는 마음이 엄습했다. 허전하고 허망한 심정을 달랠 길을 갈망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 길밖에는 내 마음을 가라앉힐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열성을 다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새벽예배도 빠질 수 없었다. 그러니 차차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아직 대학 다니는 막내가 있는데, 미혼인 딸도 있는데, 내가 흔들리면 안 되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의사로 지내면서 엄마로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다. 그럼에도 두 딸은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거쳐 취직을 했고, 학원 한 번 안 보낸 아들은 서울의대에 합격했다. 제각기 알아서 자기 일들을 해주니,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웠던지…. 제대로 표현은 못했지만, 지금까지도 고마운 마음 간절하다. 어느새 40년이 훌쩍 지났구나.
말년의 28년간을 한국기독교 의료선교협회 부속 의료선교의원(전인 치유진료소)에서 봉사했다. 그러기에 모아둔 재산은 없지만, 자식들에게 경제적 부담 주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팔십이 넘어 은퇴하려던 나는 매그너스요양병원에서 봉사하는 셈 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병원에서 내 몸이 병들거나 치매에 걸리지 않는 한 환자를 진료할 것이다. 내 몸이 병들게 되면 이곳에서 생을 마칠 작정이니, 마음이 후련하고 즐겁다.
주 5일간의 병원 생활에서 벗어나 집에 오가는 것도 재미있고, 주말마다 자식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다. 주말에 동창들, 친구들 또 기독여의사회 벗들과 만나는 것도 마음 설레는 일이다. 구순을 넘은 지금까지 직장에서 일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몸 아파 누워 있는 환자들의 육신의 병을 진료해주고, 마음의 위로와 영혼의 평안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도 가치 있는 일인지! 생각할수록 보람된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 「어느 여의사의 삶」중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회진 시간이면 로비 소파에 촘촘히 앉아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유치원 아이들 마냥 즐겁게 노래한다.
나이 들어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대부분의 환우들은 개별적 차이가 있지만, 인지도가 떨어져 있으며 당뇨병, 고혈압, 우울증, 파킨슨병, 치매, 심혈관질환, 중풍 등의 질병을 앓고 있다. 이들 중 많은 분들이 언어를 적절하게 구사하지 못하며, 말을 잊어버린다던지 심지어 자기 이름이나 가족의 이름까지도 잊어버린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분들을 보면, 팔다리의 근육이 소실되어 있고 치매 현상이 현저히 진행되어 가고 있다. 나는 이 폐단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오전에 환자들을 회진하기 전, 아침 일찍 체크해 둔 혈압, 맥박, 호흡수, 혈당수치 등을 의사들이 재확인한다. 또한 문제 상황이 생긴 환자들은 간호사들이 의사에게 보고한다. 그 다음 완전 와상(臥床)환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어나 걷든지, 로비에 나와서 손뼉 치며 노래 부르기를 권장한다. 그리고 의사들이 환자 한 분 한 분을 진찰하고 대화한다. 의사를 독점하여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쏟아내는 어떤 환자분의 경우엔 30분이고 1시간이고 대화가 끝이 나지 않는다. 의사가 그 호소를 다 들어주기만 해도 자신의 병이 다 나았다고 생각되는지, 그 다음부터는 몹시 친근감을 가지고 따른다.
약과 주사로 육신의 병을 치료하지만, 마음의 치료는 의사가 환자들의 호소를 잘 경청하였을 때 그 치료 효과가 더 클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나의 치료목표는 몸과 마음의 치유에 있다. 환자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서로 인사도 잘 주고받음으로써 환우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도 즐거워하고 나도 즐겁게 일하게 되니 매일 보람을 만끽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나이 90이 넘은 내가 일하는 것을 젊은 환자들은 꺼릴 수 있겠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마치 내가 언니나 누이 또는 친구 같은지 서로 편안하게 여긴다. 사실 늙어서도 보람된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쁘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요양병원에 오신 분들 중 다수의 분들은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니 사소한 일에도 아이들 마냥 다투기도 한다. 화해시키는 것도 의료진의 몫이다. 또는 옆의 환자와 마음이 맞으면 좋은 벗이나 자매같이 ‘언니, 동생’하며 즐겁게 어울린다.
혈압과 혈당을 조절해주고 치료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두뇌의 활동을 장려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나날이 환우들의 두뇌 기능이 쇠퇴해 가는 것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특히 누워만 있는 분들이 치매 진행속도가 빠르다. 많이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도 하는 분들은 치매에 잘 걸리지 않는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일반 환우들뿐 아니라 다소 치매가 진행되어있는 상태의 환우들도 노래를 잘 따라 부른다는 것이다. 하루는 예수 믿는 권사님인 95세 할머니가 찬송가 부르기를 좋아해서 회진 중에 나와 함께 찬송을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그러자 그 옆에 누워있던 67세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가 부르던 찬송가를 곡조 하나 틀리지 않고 4절까지 완벽하게 함께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이 67세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는데다 파킨슨병과 언어장애가 몹시 심한 분으로, 평소 말도 전혀 안 하셔서 나는 농인이신 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하! 언어장애가 있고 치매가 있어도 자기가 전에 알던 노래는 부를 수 있구나!’ 그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회진 때 노래를 통해 환우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유도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직 치매가 낫는다고 확신은 못 하지만, 다소 효과를 보는 듯하다. 현재도 이 방법으로 치매 예방을 시도하고 있다.
나는 회진 시간에 신체적인 병뿐 아니라 마음까지 돌본다. 또한 치매 예방에도 적극적으로 힘쓴다. 물론 치매약도 처방해 주지만 그 효과는 미미한 듯하다. 하지만 노래와 찬송이 우리 환우들에게 활기와 기쁨을 안겨 주는 것은 분명하다. 거기에 치유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니, 환자들도 나도 노래하는 그 시간이 말할 수 없이 즐겁다. 나는 개개인의 치매 상태와 건강 상태에 따라 곡과 가사를 선택한다. 한 예로, 뇌경색과 치매로 인해 와상 상태에 있는 할머니 환우 두 분 앞에서 이 찬송을 부르면, 한마디 말도 못 하는 분들인데도 아주 좋아하며 잘 따라 부르신다.
“참 좋으신~ 참 좋으신~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참 좋으신~ 참 좋으신~ 참 좋으신~ 나의 예수님~”
“참 좋으신~ 참 좋으신~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
“사랑의 주~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나의 하나님~”
“사랑의 주~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나의 예수님~”
“사랑의 주~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나의 아버지~”
환자분들이 잘 주무시도록 돕고, 아침에 세수시키고, 약 챙겨드리고, 삼시 세끼 식사 챙겨드리고, 2시간마다 돌려 눕히고, 기저귀 갈아 드리는 것은 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흔히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벽한 돌봐드림이 될 수 없다. 가냘프지만 분명 남아있는 의식에 기쁨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임종을 맞이하는 분들조차도 본인 옆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회진 시간에 병실을 돌아다니면서 일어설 수 있는 환자들은 모두 일어서라고 재촉한다. 일어나 걷고 노래와 찬송을 부르는 환자는 병의 회복이 빠르고, 누워만 있는 환자는 생기가 빠지고 병이 점차 깊어가는 것을 늘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수술도 못하는 대장암 말기환자가 축 늘어진 상태로 입원했다. 이 환자는 하루에 열 번씩 설사를 하고 심한 치매가 있으며 말을 전혀 못하였다. 사실 이 환자가 입원할 당시, 곧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하였다. 우리는 그분에게 매일 조금씩 보행 운동을 시켰다. 보행 6개월째는 보행기를 밀고 다니며 병원 복도를 다니더니, 일 년 가까이 되면서는 설사가 많이 줄고 산책까지 나가실 정도로 병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역시 대장암 직장암 말기 환자가 있었는데, 이 환자에게도 동일하게 보행 운동을 하도록 시도하였으나, 우리의 권면에 절대 따르지 않는 것이었다. 약도 완강히 거부하고, 우리의 간곡한 당부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매일 아침 회진 때면 긴 시간을 대화하고 그 마음을 풀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꾸준히 걸었으면 아직도 살아계셨을 거란 안타까움만 남기고 떠나신 것이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했는데….
요양병원에 10년 근무하는 동안, 일반 병원에서는 볼 수도 없고 적용도 안 되는 〈자연치료법〉이 큰 효과를 거두는 것을 경험하였다. ‘역시 사람은 즐겁게 일하고, 움직이고,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려 살아야 치매에 걸리지 않을뿐만 아니라 육신의 건강까지 유지할 수 있구나.’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가 국가 차원에서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고령층의 사회활동, 교육, 취미생활, 집단운동, 직장생활을 활성화하면 치매 예방은 물론 경제적인 부담도 줄어들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이 90을 넘기고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한 것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사는 이것이 바로 치매 예방은 물론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회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