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극적인 죽음보다 평범한 삶에 존중을 더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우리의 감각을 보다 날카롭게 한다. 그의 시는 우리의 삶을 조금 돌아보게 한다. 이런 평범한 문장으로 그를 기리는 게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걷고 뛰고 쉬는 길과 길에 김수영의 시와 삶이 묻어 있다는 상상은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 p.32
‘글쓰기, 아침 네 시간 / 책 읽기, 아침과 오후 도합 네 시간 / 밥 벌기, 오후 혹은 밤 네 시간.’ ‘일과’라는 글자에 네모 칸까지 만들어놓은 제목에 글쓰기, 책 읽기, 밥 벌기가 조로록 놓여 있는 시인의 하루. 저 모든 일이 시인의 방에서 이루어졌으리라. (…) 평생 시인이 앓았던, 자유. 내가 그 자유를 사는 것이 시인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인 것 같다.
--- p.48
자신이 쓴 시가 글도 아닌 그저 글씨의 나열이라는 고통스러운 인식. 애써 쓴 시에서 전혀 시를 발견할 수 없다는 슬픈 고백. (…) 그러나 김수영은 썼다. 쓸 수 없는 마음과 쓸수록 어두워지는 마음에 대해서도 썼다. 쓸 수 없는 모든 이유를 이용해 썼고, 심지어 쓸 수 없다는 말조차 글로 썼다. (…) 쓰지 않고서 ‘쓰는 자’로 살 수는 없다. 김수영을 읽고 내가 한 다짐이다.
--- p.63
무엇보다도 김수영은 그 도시의 극적인 변모를 보면서 한 나라의 역사를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나 자란 종로 거리가 그 변모의 중심에 있었지요. 경복궁과 광화문을 거쳐 나오면서, 혹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는 상상력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거대한 뿌리’의 민중을 만나고, 그가 태어났던 집터를 생각하고 종로의 운명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중 속에서 그가 얼마만큼 더 작아져야만 역사 속의 민중이 될 수 있는지 모래에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역사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뿌리인 작고 사소한 민중이 될 수 있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 p.91
친구들과 어울려 와세다대학 근처나 신주쿠의 술집에서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했던 김수영의 삶은 낭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대학생이 되지 못했고, 비교적 자유가 허용되는 대학가였다고 하더라도 당시는 이미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 스미요시초에서의 하숙생활에 대해서도, 와세다대학가에서의 하숙생활에 대해서도 김수영은 직접 언급한 사실이 없습니다. 아마도 〈낙타 과음〉에서 겨우 주석을 달아 회상했던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유일할 것입니다. (…) 꿈꾸던 예술과 철학을 공부하고 서울과는 다른 분위기의 도쿄에서 자유와 열망을 느끼기도 했겠지만, 당시는 전시였고, 생활의 곳곳에서 식민지 출신이 느껴야 할 부자유와 울분과 자책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머물렀던 와세다대학가를 바라보다 보면 해결할 수 없는 우울과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 p.112~113
김수영의 유명옥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시기가 김수영이 “연극 하다가 시로 전향”한 때라는 점입니다. 김수영이 《예술부락》 2집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한 때가 1946년이니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하지요. 물론 김수영은 선린상업학교 시절 교지에 시를 싣기도 했고, 일본에 체류하던 시절 미즈시나 하루키의 연극연구소를 다니면서도 시를 습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극단 청포도의 일을 도우면서 사무실에서 박인환과 만나게 되고, 연극을 하던 안영일과 박상진 등에게 임화를 소개받으면서 차츰 연극에서 시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죠. 김수영은 임화에게 매료되어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에도 드나들고 임화가 청량리에 낸 사무실에 나가 외국 신문과 잡지를 번역했다고 합니다. 김수영의 미완성 소설인 〈의용군〉(1953년경)에 등장하는 ‘시인 임동은’의 모델이 임화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죠.
--- p.159~160
연극에서 시로 진로를 바꾼 김수영에게 박인환은 ‘이상한 시’와 ‘이상한 말’로 영향을 끼쳤지요. 김수영은 박인환이 했던 말, “초현실주의 시를 한번 쓰던 사람이 거기에서 개종해 나오게 되면 그전에 그가 쓴 초현실주의 시는 모두 무효가 된다”를 되뇌곤 했다고 합니다. 김수영은 이러한 박인환의 말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요. 하지만 김수영이 박인환이 죽은 이후에 내린 결론은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입니다. 김수영은 시적 포즈에만 현혹되지 않는 시인의 진정성을 중시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박인환을 만나면서 언어가 발산하는 힘에 강한 끌림을 느꼈으나, 점차 언어의 힘 이면에 있는 시인의 고뇌를 발견한 것이겠지요. (…) 마리서사, 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시인의 정신세계가 탄생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서사를 만든 이는 박인환이지만, 마리서사를 통해 ‘진정한 아웃사이더 시인’으로 탄생한 이는 김수영이었습니다.
--- p.185~186
실제로 연합군의 반격이 있자 김수영은 유정, 김용호, 박계주, 박영준 등과 북으로 끌려가 인민군에 배치됩니다. 배치된 뒤 기대와 달리 평안남도 개천(价川)에 있는 야영훈련소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 과정은 그가 찾던 ‘자유’가 아니라, 국가폭력을 위한 강요였습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 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그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서른 살의 김수영은 한참 어린 16~18세 정도의 소년병들에게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으로 세뇌된 소년병들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했습니다. “열대여섯 살밖에는 먹지 않은 괴뢰군 분대장들에게 욕설을 듣고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산마루를 넘어서 통나무를 지어 나르”(〈내가 겪은 포로 생활〉)는 노역을 합니다. 두 달간 끔찍한 훈련을 마치고 평양 후방 전선으로 이동할 때 김수영은 탈출을 결심합니다. 인민군에서 탈출한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p.198~199
김수영은 구수동 시절, 마루에 맨발로 걸터앉아 아무 하는 일 없이 한강을 건너다보고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평화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바로 그 구수동 집에, 노동과 휴식, 일과 가족, 그리고 평화를 열망하는 시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김수영에게 구수동은 시의 공간이자, 혁명과 일상이 대비되는 지점에서 느껴지는 소심함이 똬리를 틀던 생활의 장소였습니다. 김수영은 구수동에서 1956년 6월부터 1968년 6월까지 꼬박 12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닭을 키우고, 번역을 하고, 시와 산문을 썼습니다. 4·19를 겪고 다시 5·16을 감내하면서,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내면의 혁명을 꿈꿨습니다. 김수영에게는 구수동이야말로 ‘혁명을 목격하고, 혁명을 시로 기록’했던 ‘시 혁명’의 장소였습니다.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