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휘청거리는 새벽의 공항 대합실을 같이 걸으며, 나는 가만히 신랑의 손을 끌어 쥐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의 온기를 처음 느꼈던 것도 그의 손이었다. 내가 손잡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그는 단 한 번도 나의 손을 뿌리친 적이 없다. 아무리 힘겨워도, 그의 손안에 내 손을 밀어 넣으면 그 역시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가장 든든한 준비, 그건 바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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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시간 자체가 온통 선물이구나. 파리는 우리 두 사람을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든, 어떤 궁지로부터 도망쳐 왔든 상관없었다. 서로 다른 빛깔과 무게로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모든 시간의 숨결 하나하나가 우리를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여행의 포근한 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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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미술관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신랑도 나도 유독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그림이 걸려 있는 방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 기묘하게도 설렜다. 신랑은 그림의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큰 그림에 매달려서 그림을 그렸을 어떤 사람들을 생각했다. 가장 화려하고 눈부신 빛깔로 드넓은 캔버스를 채우며, 온몸으로 기었을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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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분명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여행을 모두 끝낸 요즘도 그때 그 순간이, 그 뜀박질이 자주 생각난다. 신랑은 빨래를 가지러 가는 길에도 캠핑장에 마련된 아이들 놀이터에 뛰어들어 나무로 된 놀이기구를 타며 아이처럼 좋아했고, 나 역시 신랑을 따라 놀이기구를 타려다가 넘어져 모랫바닥에 주저앉았다. 신랑은 또 그런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런 신랑을 보고서 씩씩대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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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 무기력해지는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때 처음 우리가 ‘여행’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멈추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또 새로운 하루의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어차피 모두의 일상은 끼니를 채우고 스스로를 지키고 서로를 지키는 똑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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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했던 마음속이 방망이질했다. 노을로 뒤덮이는 하늘을 보고는 신랑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뜨거웠다. 카를교 위를 걷던 모든 사람이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빨간 하늘도 난생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고, 사람들의 탄성을 듣고 있기라도 한듯 하늘은 더욱 빨개졌다. 기다렸다는 듯 프라하성 쪽에서부터 하나둘씩 오렌지 빛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온 하늘이 빨갛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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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의 종 같은 건 울려보지도 않았고, 성당 앞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섬을 한 바퀴 도는 짧은 산책을 마치고 다시 99개 계단을 내려와 배를 타고 섬을 나왔다. 그러고 나니 신랑은 조금 기운이 난다며 여행 감수성이 30퍼센트로 올라왔다고 했다.
“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요?”
“뭐가 나쁘지 않아요? 처음 유럽 왔을 때는 100퍼센트가 넘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신랑을 보며 나는 킥킥 웃었다. 신랑은 다시 또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나도 신랑에게 손가락질을 해주었다. 우리에게는 이 정도면 ‘행복의 종’을 울린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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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도 벤치에 앉아 어깨를 활짝 폈다. 그리고 큰 숨을 내쉬었다. 믿을 수 없는 풍경 앞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는 판타지라고 생각했는데, 불가능해 보이던 꿈일 뿐이었는데, 우리 생전에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알프스의 산자락이 통째로 우리 눈앞에 자리해 있었다. 아쉽고 안타까웠던 그 시간을 뒤로하며 우리에게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아쉬워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다시 오라. 수천 년을 버티고 선 산봉우리들이 서로의 어깨를 걸고 우리를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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