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커피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고 대불호텔에서 커피를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제공한 일에 이어, 고종 황제와 손탁호텔 이야기를 거쳐, 마침내 다방이 서울에서 탄생한 경위를 설명한다. 그리고 1930년대, 인천에도 초기 모던 다방이 생긴 사실을 실마리 삼아 성글지만 항도 최초의 다방 역사를 다룬다.
아울러, 예술인들의 전용 공간으로서의 다방과, 그것이 급기야 한국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 세계 초유의 독특한 다방 문화를 만든 사회사적인 면도 조금쯤 밝혀 보기도 했다. 또한 다방이 한국인의 삶과 사회생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얼마간 기술을 하고, 거기에 딸려 1960~1970년대 인천의 다방 모습이나 생리와 그곳에 드나들던 사람들, 그리고 개인적인 에피소드 몇을 언급하기도 했다.--- 「머리말」
우리나라에 커피나 홍차가 들어온 때는 언제쯤이고, 그것을 주 음료로 한 다방이 생긴 시기는 언제일까. 커피와 홍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개항으로 개화 문물이 수입되면서고, 다방 등장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개화 문물은 대부분 인천 개항과 함께 본격 수입되었으니 이 같은 끽음료(喫飮料)가 최초로 상륙한 곳도 인천 땅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개항과 거의 동시에 인천에 상륙한 독일, 미국, 영국 등의 무역 상인과 선원 그리고 선교사 들이 인천에서 처음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1885년 4월 5일 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의 일기에 나오는 대불(大佛)호텔이 최초로 커피를 팔았거나 마신 ‘공공 현장’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공공 현장’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기는 하나, 분명한 기록이 없어 그곳에 근대적 형태를 갖춘 호텔식 다방이 있었다고 확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다방이 등장할 무렵」
초기 다방은 동호인 체제 비슷하게 운영되다가 1920년대 후반에 들면서 인텔리 문화 예술인이 직접 다방을 열고 경영하는 시대를 맞게 된다. 모던 풍조의 유행도 유행이었지만, 이들 인텔리에게 다방은 번잡한 세속 도시로부터 잠시나마 일탈할 수 있는 ‘별건곤(別乾坤)’이자 휴게소요,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다방은 모더니즘을 경험하고 흡수하는 창구요, 또 자기들끼리 사색과 담소를 나누면서 예술가적 자각을 하는 아지트였던 것이다.
스스로 네 개의 다방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손실만 입었다는 작가 이상은 “다방의 일게(一憩)가 신선한 도락이요, 우아한 예의가 아닐 수 없다”고 다방을 극찬했다. 이는 당시 이 땅의 문화 예술인들이 다방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안식처나 낙원 의식의 대변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인텔리 문화 예술인들의 안식처」
광복과 6ㆍ25는 우리 사회에 다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보자. 우선 일제강점기 말, 극도로 위축되었던 사회가 광복으로 활기와 희망을 찾으면서 사람들은 1930년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불러오고 싶었을 테고, 이러한 욕구가 다방 재건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6ㆍ25 이후에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절망과 허무를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삶을 확인하고 위한하는 심리적 장소로 다방을 찾으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법하다.--- 「광복과 6ㆍ25 전쟁 시기의 다방들」
“1960년대 이후의 다방은 그전과 달리 지식인 계층의 남자 주인 대신에 장삿속이 밝은 여주인이 얼굴마담과 레지, 카운터, 주방장 등을 데리고 경영하는 체제로 변모하였으며, 이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그러면서 시내 중심가에서 점차 주변과 외곽 지역으로 확산이 이루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것이 1960년대 다방이 본격 사업 경영의 채비를 차려 나가는 과정이다. 다방은 이제 ‘장삿속이 밝은 여주인’이 ‘다방의 얼굴’이라고 하는 얼굴마담, 즉 ‘가오 마담’을 두고, 미모와 교태를 지닌 두어 명 레지 아가씨들로 하여금 손님의 대화 상대가 되어 차를 나르며 시시콜콜한 시중을 들어 주도록 하는 경영 체제가 된다.--- 「다방 전성시대가 열리다」
앞서 소개한 미국 공보처 보고서에 “한국에서 소규모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전화, 비서, 사무실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적게 들고 편리한 다방을 애용하는 편이다. 다방은 전화도 쓸 수 있고, 그 전화를 받아 주고 차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으며, 편안한 공간까지 제공하는 ‘일석삼조’의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이른바 1960~1970년대에 유행하던 ‘다방 회사, 다방 사장’ 이야기다.
이 무렵이라면 인천에도 ‘은성다방’과 ‘짐다방’, ‘별다방’ 등을 제외한 대다수 다방이 미국 공보처 보고서 내용과 같은 풍경을 보여 주었다. 보고서에서는 ‘다방 사장’에 관해 ‘사무실을 열고 비서를 둘 정도의 자금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대부분 거간꾼 아니면 명색만 사장인 사람들이었다. 즉, 이들이 다방을 마치 자기 회사 사무실처럼, 레지나 마담을 개인 비서처럼 이용하면서 매상을 올려 주는 것으로 다방과 공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근 도장 찍는 사람들」
1970년대가 다방의 난숙기였다면, 1980년대는 다방의 분화(分化)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아직 시내 모든 다방이 뚜렷하게 쇠퇴의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형태로 생존을 위한 변신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젊은 층을 대상으로 등장한 음악다방도 시들해지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새롭게 카페가 문을 열고, 커피숍이 등장하고, 통금 해제와 더불어 야간까지 영업하는 심야 다방도 출현한 것이다.
이는 산업 사회로 빠르게 발전해 가면서 생긴 생활 방식, 취미, 오락 문화 등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다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탓에 치열한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필연적인 변화였다. 그런데 이런 흐름은 전통 다방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전통 다방 시대」
이렇게 분화한 다방은 대부분 젊은 층을 상대로 한 업소였을 뿐, 아직 변하지 않은, 중년 이상 노년층이 출입하는 전통 형태의 다방, 속칭 ‘노땅 다방’이 그대로 건재하면서 젊은 층의 다방과 양립한다. 이 시기에 일부 ‘노땅 다방’은 경영 압박을 견디지 못해 폐업하거나 도시 변두리, 혹은 멀리 농촌 지역으로 밀리면서 불법 음란 티켓 다방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2000년대까지 영업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1990년대는 다방에 더욱 비관적인 시기였다. 88올림픽 이후 세계화 추세에 맞춰 다방보다 우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카페, 레스토랑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신생 카페, 레스토랑은 말 그대로 전통 다방을 차츰차츰 몰아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방을 밀어낸 카페의 전성시대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 채 단명하고 만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국적 기업을 필두로 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막강한 자본력과 시스템으로 공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 「그 많던 다방은 다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