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로프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요?”아르카디가 빙그레 웃었다. (……) “그는 니힐리스트예요.”(……) “니힐리스트라고?”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 그건 라틴어‘니힐(nihil)’, 즉‘무(無)’에서 나온 말인데. 그러면 그 단어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해.”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받아넘기면서 다시 빵에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지요.”아르카디가 말했다. “마찬가지 아니냐?”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뇨, 똑같지는 않아요. 니힐리스트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아무리 주위에서 존경받는 원칙이라고 해도 그 원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 pp.38-39
“그럼 당신은,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제가 자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단 말인가요 (……) 당신은 이 자제심의 원인을 알고 싶다는 말이지요? 제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싶다는 말이지요?” “그래요.”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놀라움을 느끼면서 그녀가 되뇌었다. “화내지 않으실 겁니까?” “화내지 않아요.” “화내지 않는다고요”바자로프는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그럼 말하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바보처럼, 미칠 듯이…… 자, 이제 당신의 목적을 이루셨군요.” 오딘초바는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바자로프는 창문 유리에 이마를 꼭 대고, 숨을 헐떡이면서 눈에 띄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의 수줍은 떨림도 아니고, 첫 고백의 달콤한 공포가 온몸을 사로잡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가슴속에서 몸부림치는 욕망이었다. 증오와 닮은, 아마도 증오와 비슷한 강하고 고통스런 욕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디와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의 고향 마리노 마을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구 아르카디의 저택에 잠시 머무르게 된 바자로프는 귀족주의에 젖어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정치·사상·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대립한다. 진보적이며 급진적 성향을 띤 바자로프는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세상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사랑까지 부정한다. 그러면서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가 아들에게 보이는 애정까지도 전부 쓸모없는 로맨티시즘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파티에서 만난 오딘초바 부인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고 바자로프는 고뇌에 빠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