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란 말이 혈족·혈통에서 유래했듯이 유럽의 왕은 원래 부족장이었다. 부족장이 하나의 부족을 통합하고 하나의 민족을 통합하고 일정한 영토를 지배함으로써 일국의 군주가 된 것이다. 로마 제국 말기인 4세기 이후 이러한 왕들이 각각 독립하여 왕국을 형성했으며, 4~11세기까지 약 700년간 유럽 각지에서 왕국의 원형이 완성되자 대부분의 지역과 나라에서 왕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왕국은 지역의 한 부족에서 발생하여 동족관계에 있는 민족을 규합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정한 규모 이상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발전의 주체는 왕이었다. 황제가 일률적으로 로마 제국을 기점으로 삼았다면 왕은 지역·국가에 따라 기점을 달리 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은 영토·영역으로서의 토착성과 부족·민족으로서의 혈연성이 아주 강하다. 이런 토착성과 혈연성을 기반으로 한 왕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영역, 즉 유럽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주변부에서 발생했다. 그 주변부란 영국·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북유럽, 동유럽 지역이다.
--- '왕실은 탄생 배경부터 다르다' 중에서
11세기, 황제가 교황보다 우위인 상태는 지속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방의 영토를 소유한 귀족들, 즉 제후 세력에게 압력을 가했다. 황제와 대립하던 제후는 교황에게 의지했다. 교황은 제후를 받아들이면서 세속 권력을 강화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힘은 황제의 힘을 능가하게 된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복종하기로 맹세한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기독교 연대와 거기에 바탕을 둔 종교 조직에 대한 귀속의식이 강했던 만큼 국가의 존재와 그 의식은 희박했다. 종교는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연대의식의 중추가 되었다. 중세에 프랑스 국왕, 영국 국왕, 독일 황제 등 국가의 군주는 이름뿐인 존재에 불과했다.
--- '그림자 군주, 교황' 중에서
영국도 프랑스도 혁명 후에 군주제가 부활했다. 영국에서는 군주제가 부활한 후에 두 번 다시 폐지되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는 1848년 군주제가 다시 폐지된 후로 부활되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영국의 보수 세력이 민중의 불만을 교묘히 피해군주제를 유지할 만큼 노련했다면, 프랑스의 보수 세력은 그런 정치적 노련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 '왜 영국 왕실은 남고, 프랑스 왕실은 사라졌는가' 중에서
혼인관계를 통한 상속이 계속되면서 합스부르크가는 카를 5세 시대에 오스트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 외에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의 남이탈리아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이 무렵부터 근친결혼을 거듭한다. 과거부터 자신들이 혼인관계를 맺고 상속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왔으니, 다른 가문에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까 경계한 것이다.
--- '스페인 왕실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자손' 중에서
스페인의 왕위는 원칙적으로 남계 남자만이 계승할 수 있으나, 직계 남자가 없는 경우에는 여왕이 인정된다. 부르봉 왕조는 프랑스에서든 스페인에서든 ‘살리카법’이라고 해서 남계 남자의 왕위계승만을 인정하는 규정이 있다. 살리카법은 프랑크의 한 분파인 살리족이 만든 프랑크 왕국의 법전에서 유래하는데, 프랑스 왕실은 이 살리카법을 대대로 엄격하게 지켜왔다. 합스부르크가도 이 살리카법을 답습하여 다른 가문의 남성이 왕실을 빼앗는 것을 방지하려 했다. 앞에서 나왔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도 보통 여제라고 하지만 법적으로는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남편 프란츠 1세 슈테판이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후로서 공동통치자 입장이었다.
--- '스페인 왕실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자손' 중에서
때로 군주는 배신하고 모략을 짜고 도의에 반하는 짓도 서슴없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게 틈을 주고 동란을 초래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린다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냉엄한 현실에 입각한 정치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퇴색되지 않고 지배와 권력에 대한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시대에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로마 교황령, 나폴리 왕국 등 연방으로 분열되어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군웅이 할거하던 이탈리아 중에서도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에게서 이상적인 군주상을 발견한다. 체사레 보르자는 책모로 수많은 정적을 제거하여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살아남기 위한 왕실의 치열한 경쟁, 독일과 이탈리아' 중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귀족들에게 추대되어 황제가 되었으나 그녀 자신이 견식이 풍부했고 정치력도 있었다. 그래서 귀족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뛰어난 통치능력을 발휘해 러시아를 크게 발전시켰다. 예카테리나 2세의 정치력을 뒷받침했던 한 요인으로 정력의 절륜함을 꼽을 수 있다. 그녀는 귀족들과 차례로 관계를 맺고 친하게 지냄으로써 그들을 조종했다. 손자뻘인 니콜라이 1세는 예카테리나 2세를 ‘왕좌 위의 창부’라고 평했다. 예카테리나 2세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정치였을지 모른다.
--- '러시아에서 물려받은 황제전제주의의 DNA' 중에서
632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자 선거로 후계자를 결정한다. 이 후계자를 가리켜 ‘칼리프caliph’(무함마드의 대리인)라 하고 632년부터 661년까지 4대에 걸쳐 선거로 선출했다. 이 4대 칼리프를 ‘정통 칼리프’라 부른다. 무함마드의 대두에 공헌한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하심가와 먼 친척이 되는 타임가 출신이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더 먼 친척인 아디가 출신이고 3대 칼리프 우스만은 우마이야가 출신이다. 끝으로 4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된다. 이 중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그 사위 알리의 자손만을 정통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신봉자)’, 줄여서 시아파라고 한다.
--- '무함마드의 후예가 세운 현대의 아랍 왕국' 중에서
14세기 중반 무렵, 칭기즈 칸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가 쇠퇴하며 각지에서 소멸한다. 원나라는 농민반란군을 이끌던 주원장에게 밀려 중국 대륙에서 쫓겨나고,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을 세우는데, 이 중 유라시아 중부에 있던 일 칸국은 14세기 말 티무르 제국에 흡수 통일된다. 터키인과 몽골인의 피가 섞인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몽골인을 지배기반으로 새로이 등장해 몽골인 정권인 티무르 제국을 세운다. 티무르는 쇠퇴하는 몽골인 세력을 한데 모아 몽골 제국을 재건한 것이다.
---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은 왜 제국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