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반복된 패턴이라는 거울이 오늘날 세상의 사건들을 조명해 줄 수 있을까? 세계 역사의 상당 부분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바뀐 이야기, 지도자들과 정당의 이야기, 강대국들의 흥망성쇠, 이기거나 진 전쟁, 나라의 방향을 바꾼 혁명, 현 상황을 파괴시킨 재앙의 이야기다. 열왕기에 이 모든 것이 있다.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보통 중요하다. 하나님이 종종 놀라운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과 그분의 아들을 통한 야웨의 말씀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성경 전체는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하나님의 뜻에 관한 위대한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그 뜻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엡 1:10). 열왕기는 하나님이 현실에서 그분의 방향대로 역사를 빚으며 개입하고 계시다고 크게 외친다. 오늘날, 잔혹하고 불안정한 삶의 현실에서 일하는 분도 바로 그 하나님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이야말로 역사,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말씀을 살아낸다. --- '서론' 중에서
그렇다면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은 왜 하나님(혹은 어떤 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예배(예배하는 건물과 예식과 희생 제사와 함께)인 양 행동하는가?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예배에 관한 내용이 많지만(신약에는 세부 설명이 거의 없긴 하지만) 항상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 차원에서의 정의와 화해와 상관없는 예배를 혐오하시며, 올바른 예식과 멋진 건물보다 사랑의 행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심히 좋게’ 보시며, 동산에 ‘먹기에 좋을’ 뿐 아니라 우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을 제공하신 ‘하나님처럼’ 되는 일이다(창 1:31; 2:9). 그분의 존재와 위대하심을 물리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건물을 짓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언약을 지키는 공동체로 세우시는 데 더 관심이 있으시다. 그 공동체는 모든 사람, 특히 더 약하고 힘이 없는 지체들과 소유를 나누고 그들을 보살피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생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공동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운 건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아름다운 생활 방식 때문에 하나님께 끌린다(신 4:5-8; 마 5:14-16). 그와 동시에 우리가 세우는 건물들은 우리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이 단락과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라는 더 넓은 맥락은 “우리의 건물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라는 질문에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다. 수많은 ‘착한’ 일을 하며 사는 와중에, 야웨의 말씀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현실적으로 점검해 보라고 하신다. --- '4장 성전 건축과 봉헌' 중에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길은 종종 이상해 보이고 가끔은 선명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모세처럼 엘리야도 분명한 위기의 시기에 권력의 중심부에서 선포하기 시작했지만, 오랜 기간 멀리 떨어져서 활동에 제한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모세는 한 가정과 사십 년을 함께 보냈고, 엘리야는 홀로 지내거나 또는 과부와 그 아들과 함께 삼 년을 보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만나게 될, 도전을 받아야 할 수천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임재를 통해 이방인 과부와 아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생명을 주셨다. 열왕기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 장에서 왕은 한 번 언급될 뿐이다. 왕에 관한 해설이 나오는 열여섯 장 이후에 청자들과 독자들은 하나님이 과부와 아비 없는 이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시 68:5). --- '8장 위기를 맞닥뜨린 엘리야' 중에서
우리는 ‘산에’ 있을 때, 곧 익숙한 영역에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지’ 알고 그분을 찬양하고 복음을 선포할는지 모르지만, 공적인 삶의 영역 즉 ‘골짜기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를 수 있다. 어떻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드러내며 그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최근 몇십 년 동안 격려가 되는 것은 성경과 신앙이 공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논의와 토론이 늘어 가는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야웨로부터 구체적으로 아합의 상황에 맞는 말씀을 가지고 왔다. 오늘날 하나님이 전문 지식과 영적 분별로 개인들과 단체들을 세워 가시는 모습에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와 가정에서만큼 공적인 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믿음대로 살 수 있을지 또 어떻게 살아 낼지는 계속 논의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 생활의 벤하닷들과 ‘큰 군대’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리라]”(빌2:10-11) 확신하며 살도록 서로 격려해야 한다. --- '9장 죽음을 맞이한 아합과 일부 선지자들' 중에서
여기서 나병 환자들이 ‘아름다운 소식’을 접한 첫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인용되는 스리랑카의 그리스도인 지도자 나일스(D. T. Niles)의 표현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복음 전도는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빵을 발견한 곳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빵’은 나누어야만 한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말한다. “야웨의 소리 전략은 소식을 전해 준 나병 환자들이 없었다면 미완성일 것이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은 그들 혼자서는 전해야 할 소식이 없었을 것이다.” 부분적으로 자기 이익이 동기가 되었을 수 있지만(“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풍요함을 나누어야 하며 그들 자신보다 더 큰 그룹에 속해 있음을 알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이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도록]”(골 1:12) 복음을 나누라고 하신다. --- '14장 엘리사와 시리아 군대' 중에서
열왕기의 첫 독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실현될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이후에 나오는 역대기는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라는 고레스의 칙령으로 마무리되지만, 열왕기에서는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유배자’에게 지속적으로 적절하다. 마치 부활 전날, 토요일의 삶 같다. 일요일이 오겠지만, 어떻게 언제 올까?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비추어 우리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알지만, 현재의 ‘유배’ 상황을 지나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열왕기의 대답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듣는 이들이 과거로부터 배우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족장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을 되돌아보도록, 그들의 세대를 포함한 여러 세대 동안 반역한 그 결과를 인지하도록, 야웨만을 예배하고 그분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이 통제력을 잃거나 실패하지 않으심을 알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 ' 22장 바빌론에서의 실낱같은 소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