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 근간은 숙지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도의 생 각으로 시작한 공부는 급기야 ‘종교개혁사 시리즈’를 출간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 았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신앙이 종교개혁사를 통해서 보는 여러 선인(先人)들의 수고와 헌신적인 복음 증거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 았으나, 그들이 증거하고 전하여 준 복음이 사도들의 그것에 얼마만큼 일치하는 지를 증명하는 문제는 오히려 예기치 못한 엄청난 도전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 를 증명하는 방법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과 가르침을 특 정 기간별로 구분하고, 오늘 우리의 것과 비교해 나가는 작업을 통하여 그 연속 성과 일치를 확인하는 것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통상적으로 개 혁 교회가 16세기 즈음에 일어나 그때부터 존재하게 되었다고 여겨 한결같이 그 렇게만 믿고 이해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전, 고대의 개혁 교회 역사를 추적 한다는 것 자체가 훨씬 쉽지 않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에 교회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이제는 풀지 않으 면 안 되는 의구심으로 끊임없이 발전했기 때문에 간결하게 만들려 했던 책의 출 간은 계속 미뤄지게 되었고, 나름대로는 정돈의 수준과 깊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루터 이전의 개혁 교회 역사 연구를 추고하는 버거운 작업에 엉겨들고 말았다. 비컨대, 센강의 한 쪽 어귀에나 겨우 띄울 쪽배 하나 끌고 첨벙 물에 들어갔다가 대양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에 이끌려 대서양으로 나서 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단 한 권의 변변한 자료도 없이 시작된 첫 항해부터 폭풍 과 노도 같은 과제를 만나 좌절하고 두리번거리기 일쑤였지만, 그저 그대로 항해 를 접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바다 한가운데 어느 섬에 도달하였을 때는, 필자와 동일한 궁금함으로 항해를 시도하던 몇몇의 항해사(저자)들을 만나 그들의 충고 를 얻기도 하고 항행의 방향을 다잡으며 속도를 더 높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 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오래된(고대의 외국) 언어라 소통 자체에 또 다른 난감 함을 경험하기도 했고, 자주 향방 잃은 항해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기에 지나온 항행의 흔적을 일단 고정해야 했고 출간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게 되었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흡족하지 못하지만 우리말로 작성하는 국내 처 음의 항해도임에 일단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훗날 누군가 이 지도를 근거로 더 넓 은 대양의 정보를 풍부하게 정돈해 주기를 기대한다.
개혁 교회는 어떻게 태동하였을까? 개혁 교회의 목표가 초대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과 그들의 단순한 제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16세기 이전에도 너 무나 많은 개혁자들이 있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하게 신앙을 고백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교회 역사의 각 세기마다 개혁 교회는 너무나 자주 ‘이단 따위’로 간주 되어 개혁자가 된다는 일 자체가 곧 순교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 리에게 소개된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위클리프, 후스, 루터, 칼뱅과 같은 크고 뚜 렷한 몇 개의 점()에만 그 논의를 국한하고 있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런 관점은 개별적으로 그 위인들의 위대함만을 강조하면서 개혁자들의 신앙과 삶은 그 특정인들의 것으로만 기념하게 만듦으로써, 우리 같은 대다수 후예들조차 종 교개혁 기념 주일에나 개혁자들의 이름을 불러보는 정도에서 할 일 제대로 했다 는 식으로 만족하도록 길들였던 것이다. 위대한 개혁자들의 점()과 점이 연결 되는 현장에는 수많은 무명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그들의 개혁적 신앙과 삶을 이어 오는 점()들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또 다른, 가늘고 굵은, 길고도 굴곡진 선(線)들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소중한 개혁 신앙을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은 작은 점()에 해당되는 더 많은 개혁자들의 삶을 간절함으로 추적하 여, 더 이상 점()으로서의 역사 이해가 아니라 끊이지 아니하는 선(線)으로서 개 혁 교회사를 이해하도록 도우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마 치 마르틴 루터가 처음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한 것처럼 루터를 기준하여 ‘종교개 혁 500주년’과 같은 표현을 분별없이 말하는 난센스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선조 들처럼 우리 모두가 개혁자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갖고 의미 있는 성도의 삶을 살 고자 낱낱이 애쓰도록 동기를 부여(motivate)하게 될 것이다. 또한 무명 개혁자들 의 헌신과 수고가 잇대어 선(線)으로서의 개혁 사상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온 것처 럼, 우리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한 작은 점이 되어 끊어지지 않을 선으로서의 개혁 신앙을 전달할 사명을 나눠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필자가 이미 종교개혁과 관련된 여러 사적지를 방 문하면서 담아온 사진들을 게시한 점에도 있겠지만, 19세기 이전의 역사가들이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전달하려고 그 열정을 오롯이 판화들에 담아 그 생동감을 전한 데에도 있을 것이다. 이미 그 지적 소유권이 만료된 판화들 가운데 주옥과 같은 자료들이 적지 않아 이를 기쁘게 소개하였다.
정작 개혁 교회의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가 16세기 이전의 개혁 교회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동안 아나밥티스트, 형제교회, 몰몬교의 사학자들은 자신들 교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상당한 연구 업적들을 쌓아 놓았다. 특히 그들이 발도인들 선조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된 배 경에는 침례의 정당성이나 유아 세례의 부적절성과 같은 자신들 교단의 발생 근 거를 역사적 관점에서 증빙해 보려는 목적이 다분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침례라 는 세례의 형식과 유아 세례의 가부가 마치 그리스도교 신앙과 복음의 전부 내지 는 유일한 핵심인 것처럼 거기에 집중하고 집착하는 태도로 교회사를 붙들려 노 력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상한 수준을 넘어 처절해 보이기까지 해 더욱 안타깝 다. 그리하여 결국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과 체재와 방법에 관한 지엽적인 논쟁과 주장 때문에 형제와 형제가 일어나 삿대질하고 서로 에게 대항하여 ‘이단(異端)이니 사탄(satan)이니’를 외치며 대결하게 된다면, 우리 가 과거의 역사를 살펴서 오늘날 힘입게 되는 이 일반 은총의 공효(功效)가 오히 려 그리스도의 겸손하신 섬김으로 우리가 덕 입은 특별 은총의 소중한 의의(意義) 를 상당히 손상(損傷)시키는 것은 아닐까,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또한 본문에서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타락한 사제들이 마치 구원을 베푸는 것처럼 집례하는 미사나 고해성사, 세례들을 부정하며 거절했던 것은 ‘사제의 세례는 곧 중생이라는 그릇된 주장’에 대한 정의로운 반발이었다. 그럼에도 16세기 발도인들이 개혁 진영으로 합류하면서 유아 세례를 비롯한 몇몇 이슈들(issues)을 순순히 수용하고 화합하였던 용감한 변화들을 마치 영적인 타락 혹은 그릇된 전향인 것처럼 해석하려는 태도들도, 어떤 특정한 목적에 추동되어 억지로 만든 역사 이해의 결론이 아닌가,라는 아픈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세상 어느 책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부족한 필자에게 이 시리즈의 출판은 참으로 난산(難産)이었다. 필자는 이 첫 책의 출판에 즈음하여, 어려서부터 친구이고 사역 시작에서부터 동료이며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서로 떠난 일이 없었던 단짝 이은택 목사가 지지, 격려, 연구 참여, 고안으로 기여해 주었음을 독자들에게 밝혀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부족한 필자의 어수선한 연구를 꿰어 이만한 작품으로 지어낸 것은 오직 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차의 정리부터 주제들의 흐름을 재정돈하고, 각 문단과 문장들에 색깔과 옷을 입혀 글이 되고 이만한 책 모양을 갖추게 한 것은 그가 섬겨 준 일의 일단일 뿐이다. 필자는 석탄이 연탄으로 찍혀 나오고 구슬이 보배가 되도록 꿰이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그의 헌신을 지켜보며 경험할 수 있었다. 필자가 혼자 연구해 온 개혁 교회사의 상당한 부분은 이제 그의 손에서 다시 정리되고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계속 출판될 시리즈에서 그 성과가 고스란히 나타날 것이므로 더욱 간절한 기대를 갖게 된다. 또한 원고의 정리와 조판 과정에서 필자와의 거리와 시차 때문에 어려움이 있음에도 밤낮 가리지 않고 수고하셨던 김민철 목사님의 열정과 진정어린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외에도 자주 연구가 막히고 글이 막다른 데서 더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할 때마다 불현듯이 천사처럼 나타나 지지와 도움과 조언을 주신 선배와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를 오늘의 때에 이 땅에 보내셔서 없어지지 아니할 한 점으로 살아갈 기쁨과 사명감을 주시는 분, 세상에 두신 교회들에 날마다 생명력을 더하셔서 새롭게 하시고 그 참다움과 의로움과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은혜 베푸시는 주님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
2019년 10월
권현익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