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피우지 못하는 날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세요
수도자도 화가 나는 날이 있고,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을 다독여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나름대로 터득했습니다.
삼십대 중반에 오카야마로 파견되어 대학 학장이 되면서 마음이 어수선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 신부님 한 분이 영어로 된 짧은 시를 한 편 건네주었습니다.
“Bloom where God has planted you.”
(주님이 심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쩔 수 없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주위 사람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으신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곳이 어디든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지켜봐 주시는 분’이 있다는 안도감이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 주었습니다.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면 됩니다. 반드시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을 피울 날이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pp. 6~7
행복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도쿄에서 자란 내게 오카야마는 낯선 땅이었습니다. 게다가 대학의 초대 학장과 2대 학장은 모두 70대 후반의 미국인 수녀님이었죠. 그 대학의 졸업생도 아닌데다 전임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에 학장이 되었으니 주위 사람은 물론이고 나 자신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수도원은 윗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당치 않다고 생각되는 일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낯선 땅, 생각지도 못한 자리, 경험하지 못한 생소한 일들의 연속……. 내가 생각해 왔던 수도 생활과 큰 차이가 나는 현실 앞에서 어느 샌가 나는 남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책임 전가족(族)’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네!’ ‘이렇게 힘든데 위로의 말 한 마디 해 주지 않아.’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아.’
자신감을 상실한 나머지 수도원을 떠나 버릴까 고민하던 내게 한 신부님이 영어로 된 짧은 시를 한 편 건네주었습니다. “주님이 심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시였습니다.
오카야마라는 낯선 곳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쉬운 학장이라는 자리를 맡아 온갖 고생을 하는 나를 보다 못해 건네주신 걸 테지요.
나는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만 하고 주위사람의 태도에 따라 행복해졌다 불행해졌다 한다면 환경의 노예일 뿐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디서든 그곳에서 환경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꽃을 피우자!’ 그 결심은 내가 달라져야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심은 자리에서 꽃을 피우세요.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웃는 얼굴을 지어 주위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어
신께서 당신을 그곳에 심으신 것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책임 전가족’이었던 자신과 이별을 했습니다. 내가 먼저 학생들에게 인사하고, 미소 짓고,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교직원도 학생도 밝은 얼굴로 상냥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삶’은 재학생과 졸업생들에게도 파급되었습니다. ---p. 15~17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세요
문명의 이기는 우리에게 편리함과 안락함과 빠른 속도를 가져다준 반면 기다리기, 인내하기, 조용히 생각하기 같은 습성을 앗아 갔습니다.
몇 년 전인가 NHK에서 한 미국 소년의 이야기를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또래 친구가 없었습니다. 소년의 주변에는 사회에서 악인으로 낙인 찍혀 외면당하는 사람들뿐이었지요. 그렇게 비행을 저지르다가 붙잡혀 복역 중인 15세 소년의 이야기였습니다.
소년은 형을 마치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 수감자가 소년이 일하는 작업장에 와서 말을 겁니다.
“너는 어떤 일을 만났을 때 반사적으로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순서로 살아 왔니, 아니면 그 반대 순서로 살아왔니?”
소년이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순서였다고 대답하자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앞으로는 반대 순서로 해 봐.”
그때부터 소년의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무슨 일을 당하든 먼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실패를 하면서도 이 순서를 지킨 결과 마침내 올바른 길을 걷는 인간이 되었지요.
먼저 생각하고 느끼는 여유를 갖고, 그다음에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삶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발행한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학교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기 위한, 또한 인격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학교를 근본으로 한다.…… 인간이 인격체가 되는 것이 가톨릭 학교의 목표다.” ---p. 73~75
‘인생의 구멍’을 통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강의 중에 ‘인생의 구멍’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한 4학년 학생이 내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수녀님, 방학 동안에 제 인생에 구멍이 뚫렸어요.”
학생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인과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결과는 좋았지만 앞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가 아이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큰 충격을 받고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감출까도 생각했지만 언젠가 알게 될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솔직히 털어놓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차분하게 이렇게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걱정 마! 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당신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그 학생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만일 제 인생에 이 구멍이 없었다면 결혼한 뒤에도 평생 그 사람의 성실함과 사랑의 깊이를 모른 채 살았을 거예요.”
그 학생은 자신의 인생에 뚫린 ‘구멍’ 덕분에 그 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나 부처의 사랑에 가까운 그 남자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았던 겁니다. 이처럼 인생의 구멍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의 냉기로 인해 그 전까지 깨닫지 못했던 타인의 사랑과 배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죠.
오래 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깊고 어두운 우물 바닥에는 한낮에도 우물 바로 위의 별빛이 비친다. 우물이 깊으면 깊을수록, 안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빛은 선명하게 비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나의 인생에도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이 뚫렸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구멍 투성이 인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데,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신앙 덕분입니다. 종교는 인생의 구멍을 막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에 구멍이 뚫리기 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그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은혜와 용기, 격려를 주는 것이 종교가 아닐까요. ---p. 98~100
9년 동안 내게 평생의 사랑을 주신 아버지
함께한 시간이 9년뿐이라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 막내와는 네가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니까”라며 늦둥이인 나를 특별히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두 오빠가 부러움에 심술을 부렸을 정도였지요.
퇴근해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현관에서 반기며 그 품에 달려들어 안기는 것도 막내의 특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군복 주머니에 숨겨 온 봉봉 초콜릿을 살그머니 건네주곤 하셨지요.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에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학교에서 배운 『논어』를 같이 읽으면서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독서를 매우 중시했던 아버지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을 겁니다.
과묵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데 평소 말이 없던 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머니도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시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자식들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 주신 반찬을 당연한 듯 먹고 있는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주의를 주신 거였고, 또 평소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위로의 말씀이었겠지요.
노력하는 분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한 아버지는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육군대학교에서는 졸업할 때 스승의 군도(軍刀)를 받고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절대 자랑하지 않는 분이라서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니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외국 주재 무관으로 여러 차례 해외에서 생활한 아버지였으니까 어학에도 능통했을 겁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네덜란드 등에 머물면서 깨달은 것은 ‘이기든 지든 전쟁은 국가를 피폐하게 할 뿐이다. 군대는 강해도 좋지만 전쟁만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방해가 될 거야”라고 언젠가 어머니에게 털어놓으신 아버지는 전쟁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걸림돌과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언젠가 그들의 손에 매장될 거라는 각오도 하셨겠지요. 그 증거로, 2월 26일 이른 아침 총성이 울렸을 때 아버지는 재빨리 머리맡 벽장에서 권총을 꺼내 응전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는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옆에서 자고 있던 나를 깨워 재빨리 벽에 기대 두었던 좌탁 뒤로 숨겼습니다. 그리고 생전에 귀여워했던 막내딸과 불과 1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서 당신의 딸을 살리고 돌아가셨습니다. 1936년의 군사 쿠데타, 2 ? 26사건이 일어난 아침이었습니다.
내가 성장한 뒤 언니한테서 들은 바로는,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손자 볼 나이에 아이를 임신했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나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셨다고 합니다. 그때 “창피할 게 뭐 있냐, 낳아라” 하는 아버지의 한 마디 덕분에 내가 태어났답니다. 어쩌면 아버지를 서른 명의 ‘적’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돌아가시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9년.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께 받을 사랑을 전부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p. 171~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