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극적인 만남? 역시 예나 지금이나 ‘극적’인 것에 시련이 빠질 수는 없는 법이다. 타고 와야 할 비행기가 ‘오늘’이 아니고 바로 ‘어제‘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처음엔, 행여나 혼자 지내는 와이프 심심할까, ’비행기 놓치기‘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했나?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미리 사 둔 티켓은 멋지게 공중분해 시켜버리고, 새 티켓까지 사야 하는 1+1 이벤트일거란 뜻인 줄은 전혀 몰랐다. ‘미친 거 아냐?’ 허공으로 사라진 금쪽같은 돈과 그만큼 줄어든 시간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워워워…. 참자 참아.
--- 「1장, 웃기는 가족 상봉」중에서
차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방법을 찾아간다. 그 와중에 ’후루룩 쩝쩝, 후루룩 쩝쩝‘ 젓가락질 한 번마다 내 불편한 현실은 그 ’후루룩 쩝쩝‘ 속 어딘가로 스며들어 가 버렸는지 신기하게도 슬슬 행복해진다.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이 여기, 페로섬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진다. 라면은 마트 말고 약국에서도 팔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끝내주는 만병통치약이다. 심지어 바삭거리는 생라면을 침 살짝 발라 스프 가루에 찍어 먹어도 행복해지니까.
--- 「1장, 친절하게 생긴 사람은 없다」중에서
‘다다다다다다’ 또 아무 대책 없는 ‘행동’이란 놈이 내 생각을 앞선다. 엄지발가락의 괴력으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며 들판을 뛰어다녔던 만화 [미래소년 코난] 속 포비와 코난. 내 발가락에도 힘 꽉 주고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내 마음속 열정을 따라잡지 못하고, 오랜 트레킹에 풀려버린 다리는 엄지발가락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큰길로 나아간다. 시골이라 정해진 정류장이 아니어도 버스를 세워 탈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서.
--- 「2장, 300번 버스를 잡아라」중에서
전업주부 20년 차라, 웬만하면 머물고 난 자리는 깨끗이, 내 흔적 하나 안 남기려 한다. ‘직업의식’이 발동된 건데, 왠지 있어 보이는 것만 같아서다. 별개 다 있어 보인다 하고 싶겠지만 그래도 뭐 하나 내 세울 것 없는 주부가 나름 주 종목에서라도 있어 보이고 싶은 소소한 바램인 거다. 나중 일이지만 투명인간처럼 지낸 나에게, 에어비앤비 주인은 아주 좋은 평가를 남겨줬다. 얼굴 한 번 본적도 없는데. 혹 카메라를 숨겨두고 나를 지켜봤나? 먼지 하나 없이 잘 치웠다고 감동 받았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후한 평가를 줬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 「3장, 내 흔적 따윈 남기지 않을 거예요」중에서
“우리가 태워줄게, 타!”
그 말을 하는 그녀들 뒤로 샤랄라~ 환한 후광이 막 비친다. ‘세상에! 하나님도 비수기라 심심하신가? 왜 나만 이렇게까지 보우하시지?’ 놀라 기절할 맘을 붙들고 다시 한번 물어본다. ‘정말, 나를 삭순까지 태워주시겠단 말씀이셨나요?
--- 「3장, 네 번째 히치하이킹」중에서
‘등대를 봐야 해? 꼭 가야 해? 왜?’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굳이 가지 않아도 사는데 별문제 없을 것 같다. ‘내려가? 말아?’ 내려가는 것도, 계속 올라가는 것도, 그냥 여기 이대로 서 있는 것도 모두 무섭다. ‘어떡하지? 어떡할까?’
발이 움직인다. 한 발, 한 발. 위로 올라가고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올라가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럼 계속해야지. 그 순간, 가족이나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다면 아마 난 쉽게 포기했을 거다. 내려가자고 억지를 부렸을 거다. 혼자여서 다행이다. 겁먹고, 약해빠진 나를, 씩씩한 내가 나타나 멋지게 구해낸다.
--- 「4장, 그래서 길은 어디에」중에서
걸어도 걸어도 10분이면 끝나는 초미니 마을. 손을 비벼 언 양 볼에 대 보기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홉홉’ 제자리 뛰기도 한다. ‘갈매기 커플에게 다시 가 볼까? 추워 얼어 죽는 것보단 어색한 게 더 낫겠지?’ 이러긴 싫은데 비굴해지기 시작한다. 영화 [베테랑]에서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고 했던가. 그 ‘가오’가 서서히 없어지려 한다. 미치겠네.
눈치 없게 오줌은 왜 또 이렇게 자주 마렵고 지랄인지. 두꺼운 옷, 입고 벗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추위에 신난 건 요 ‘오줌’ 딱 하나다. 이마 딱! ‘그래 바로 이거야!’ 치르치르 행복의 파랑새처럼, 지금 날 구원해 줄 행복은 바로 여기, 내가 들락날락하는 화장실이다.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오두막집 같은 건물 안엔 화장실 3개와 작은 공간이 있다. 화장실 냄새도 전혀 없고, 미세하지만 히터도 나온다. 무엇보다 좋은 건 아무도 없다는 거다. 이 섬에서 추워 떨고 있는 건 ‘히치 하이커, 나’ 하나 뿐일 테니까. ‘무조건 버티리라.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저 배를 타고 이 섬을 탈출하리라. 나를 따르라!’
--- 「4장, 화장실, 칼소이섬 최고의 휴식 공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