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난뤄구샹 초입의 동쪽(오른쪽)에 위치한 차오더우(炒豆), 초두 후통 앞에서는 옷깃을 여미여야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1년 1월부터 1922년 여름까지 머물렀던 골목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신채호 선생은 장남 신수범을 낳았고, 중국어 독립운동 잡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월간지 「천고」는 7호까지 발간됐다고 알려졌는데, 현재 베이징대 도서관에 1~3호가 소장돼 있다. 신채호 선생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도움을 받아 한국 독립운동의 당위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이 잡지를 펴냈다. 놀라운 점은 신채호 선생이 중국 식자층보다 더 유려한 한문 글 솜씨를 자랑했다는 사실이다. --- p.16
우당 김회영의 집에는 늘 독립투사들로 붐볐다. 우당 의 동생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는 아예 얼마간 함께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 안창호, 김규식, 조소앙, 조성환, 박용만, 김원봉, 이광, 송호성, 유석현, 이을규, 이정규, 정현섭, 김종진, 임경호 등도 베이징에 머물 당시 우당의 집을 찾았다. 매일 적게는 10명, 많을 때는 40명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우당의 아들 이규창은 “국내에서 조국 독립의 꿈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베이징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뵈었고, 대체로 우리 집에 거주했다”라고 회고했다. 허우구러우위안 후통의 우당 집이 독립 운동가들의 집합 장소이자 망명객들의 사랑방, 독립운동 본부였던 셈이다. --- p.50
1944년 1월 16일 이육사 선생이 순국한 곳은 둥창 후통 28호다. 이곳은 당시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의 총영사관 부속 헌병대 감옥이었다. 이육사는 지하 감방에서 숨을 거뒀다. 28호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경내에는 옛 일본 총영사관 건물 한 채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근대사연구소가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도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역사에서 ‘방심은 금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 p.62
샤오펑센과 함께 빠다 후통에서 가장 유명했던 ‘남반’ 명기는 사이진화(塞金華), 새금화(1872~1936)다. 미인이 많이 나온다는 장쑤성 쑤저우 출신인 그녀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자오링페이(趙靈飛), 조령비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13세 때부터 최대 고급 홍등가였던 난징의 친화이허에서 손님 시중을 들었다. 기녀의 일을 배우며 가문에 누가 될까 우려해 이름을 푸차이윈(?彩云), 보채운으로 바꾸었다. 미모는 물론 친화력이 뛰어나 친화이허 홍등가에선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 p.93
루쉰은 늘 근엄하고 심각한 표정이었지만, 옆집의 어린 자매들에겐 자상한 아저씨였다. 자매를 마당으로 불러 나무 장난감을 깎아 주기도 했다. 대륙의 칼바람이 부는 겨울철 베이징에선 과일이 매우 귀했다. 서민들은 과일 대신 무를 즐겨 먹었다. 밤이면 무 장수들이 “무가 배를 이겨요~(무가 배보다 맛있어요~) 무 사요~”라고 외치고 다녔다. 자매들은 종종 루쉰에게 무를 사 달라고 했다. 자매는 무를 베어 물고 “무를 많이 먹으면 선생님처럼 글을 잘 쓰나요”라고 물었고, 루쉰은 빙그레 웃었다. 루쉰의 시에는 “무정한 사람이 꼭 호걸은 아니네.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고 대장부가 아니라 할 수 있나(無情未必眞豪杰, 憐子如何不丈夫)”라는 구절이 있다. 봉건주의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중국인의 정신을 차갑게 꾸짖은 루쉰이었지만, 좐타 후통 84호에 살 때만큼은 연민과 동심이 가득했다. --- p.185
「징바오」를 창간한 인물은 중국 기자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사오피아오핑(邵飄萍), 소표평(1886~1926)이다. 그는 신문사와 통신사를 설립해 취재기자, 편집기자, 주필, 사장 등을 두루 거쳤다. 스트레이트, 박스, 논설, 사설, 비평 등 다양한 형태의 신문 글쓰기의 전형을 일군 인물이다. 군벌 정부에 일격을 가한 5.4 운동의 발기인이었던 사오피아오핑은 중국 신문 이론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14세 때 수재(秀才)에 합격한 이후 저장성 고등학당에 들어가 공부했다. 졸업 후인 1918년 10월 「징바오」를 창간했다. 사오피아오핑은 창간 2년 전부터 웨이란 후통 30호에서 살고 있었다. 창간 이후에는 아예 이곳을 신문사 편집국으로 사용했다. 그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은 일선 기자들에게 내주고 본인은 어두침침한 북향 방을 썼다고 한다.
--- p.275